시
[박노해] 탈주와 저항
지갑 속의 학생수첩
2013. 6. 18. 19:18
일상은 거대한 중력만 같아
먹고 사는 건 끈질긴 굴레만 같아
삶은 어디로 탈주했을까
생활 바깥에 뭔가 내가 살아야 할
바람과 햇살과 떠돌이 별과
거기 내가 만나야 할 누군가
울며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밤이 걸어올 때
하루하루 내 존재감이 사라져가고
달릴수록 내 영혼이 증발되어가고
탈출 같은 여행도 발작 같은 비판도
솟구친 만큼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고
일상의 속도와 불안과 두려움이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는 아침이 등을 떠밀 때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는 일상인가
내가 살아야 할 삶은 어디에 있을까
미아처럼 어느 골목 끝에서 울고 있을까
검은 숲에서 반인반수로 떠돌고 있을까
끈질긴 생활의 힘으로
강력한 일상의 힘으로
나에게는 생존의 굴레를 뚫고 삶으로 진입할
치열한 탈주와 저항이 필요하다
끝내 별똥별처럼 추락할지라도
대기권을 뚫고서 별과 입맞춤한 죄로
지구에 떨어져 얼음 속의 꽃씨가 될지라도
나와 같은 한 걸음의 또 다른 내가 필요하다
지금 나에겐 축적이 아닌 혁명이 필요하다
- 박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