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산] 빈 집

지갑 속의 학생수첩 2015. 3. 13. 20:08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쑤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벵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 백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