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는데, 아이 하나가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있다. 나는 옆에 선 채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영
철이랑 미영이는 사랑한대요.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
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주뼛거리다가 후다닥 달아
난다. 너무 곧장 달음박질쳐서, 바로 앞에서 점점 작
아지는 것 같다.
유심히 보면 담벼락 아래에는 잘게 부서진 백묵 가
루가 수북하다. 아이는 정말 온 힘을 다 주어서 꾹꾹
눌러쓴 것이다. 허리를 굽혀 손가락에 묻혀본다. 씨
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참 부드러운 증오다.
가방 속엔 빈 도시락 통이라도 들었는지 소리가 요
란하다. 아이는 벌써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지만 아직
도 들려온다. 수치심이란 저렇게 오래도록 덜그럭거
리는 것일까.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문득 본다. 수많
은 빛살들이 같은 쪽으로 도망치다가 컴컴한 그림자
들로 길바닥에 와르르 넘어지고 있는 것을.
- 심보선.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병률] 사랑의 (무거운) 신호 (0) | 2015.02.12 |
---|---|
[진은영] 대학 시절 (0) | 2015.02.12 |
[정해종] 방전하는 밤 (0) | 2015.02.12 |
[황인숙] 강 (0) | 2015.02.12 |
[황인숙] 꿈 (0) | 201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