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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 더보기
[김선우] 하이파이브 일년에 한번 자궁경부암 검사 받으러 산부인과에 갈 때 커튼 뒤에서 다리가 벌려지고 차고 섬뜩한 검사기계가 나를 밀고 들어올 때 세계사가 남성의 역사임을 학습 없이도 알아채지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뜻해졌을 텐데 최소한 예열 정도는 되게 만들었을 텐데 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닐 텐데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차고 거만한 기계의 움직임을 꾹 참아주다가 커튼이 젖혀지고 살짝 피가 한 방울, 이 기계 말이죠 따뜻하게 만들면 좋지 않겠어요? 처음 본 간호사에게 한마디 한 순간 손바닥이 짝 마주쳤다 두마리 청개구리 손바닥을 짝 마주치듯 맞아요, 맞아! 저도 가끔 그런 생각 한다니깐요, 자요, 어서요, 하이파이브! - 김선우. 더보기
[안도현]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안도현. 더보기
[홍성란] 돌아오는 길 네가 감추려는 것 이미 알고 있으니 거짓말 안 해도 돼 그냥 믿어줄 테니 이것이 사는 법이라고 웃지 않고 웃었네 - 홍성란. 더보기
[황성희] 부부 낱말을 설명해 맞히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 웬수 - 황성희. 더보기
[피천득] 눈물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 피천득. 더보기
[유하] 오징어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유하. 더보기
[임길택] 아버지 자랑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 자랑이 무엇일까 하고 오늘에야 생각해보면서 그러나 탄 캐는 일이 자랑 같아 보이지는 않고 누가 먼저 나서나 몰래 친구들 눈치만 살폈다 그때 영호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술 잡수신 다음 날 일 안 가려 떼쓰시다 어머니께 혼나는 일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웃음소리로 넘쳐 흘렀다 - 임길택. 더보기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더보기
[박남준] 독거노인 설문 조사 우울증은 없는가요 너무 행복해서 탈이네요 충치, 틀니를 하셨는지 잘 씹어 먹어요 담배는 하루 몇 개비 피워요 갑으로 물어보세요 갑으로는 문항이 없는데요 그럼 열 개비 이상 약주는 하셔요 술은 몇 잔 정도 몇 병으로 물어봐요 최근에 병원에 가신 적이 있는가 생활은 어떻게 하시나 생활보호 대상자는 아니신가 시인이에요 시인 인기척에 나가보니 웬 아주머니 하는 말 군 보건소에서 나왔는데 독거라는 말끝을 자르며 독거노인 조사요 아니 옆집도 있고 아랫집도 있는데 그랬더니 그분들은 함께 사시잖아요 우리 나이 쉰넷, 사고로 다친 무릎이 쑤시고 절뚝거리며 치통이 자주 양수쌍쌍겸장으로 관자놀이 편두통을 쨉 훅 어퍼컷 카운트 펀치로 휘두른다 온갖 잡문을 써서 꾹꾹 눌러 담은, 월수 삼사십, 한 시인의 경제가 싹 벗겨져 들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