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영미] 담배에 대하여 (0) | 2015.02.12 |
---|---|
[최영미] 선운사에서 (0) | 2015.02.12 |
[신현림] 슬럼프에 빠진 그녀의 독백 (0) | 2015.02.12 |
[황지우] 뼈아픈 후회 (0) | 2015.02.12 |
[주요한] 복사꽃 피면 (0) | 201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