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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고세훈] 조지 오웰: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 그가 죽고 2년이 지나 출판된 에세이 「그런 기쁨들」에는 가난으로 인해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그가 겪었던 '굴욕들'이 끝없이 나열돼 있다. 학교는 그에게 죄란 반드시 그가 범한 무엇일 필요가 없으며 권력과 덕성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오웰은 "가난한 집 아이를 가장 확실히 망치는 방법은 부자학교에 보내는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리고 수치와 죄의식의 트라우마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게 될 터였다.


- 1931년 성탄절 직전에는 구치소에 들어가기 위해 빈속에 위스키를 병으로 마시며 일부러 경찰 앞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당시의 구치소 경험을 글로 옮긴 것이 인물들을 통한 시대묘사가 백미인 「구치소」이다. 가령 오웰은 피의자 한 사람이 "무서운 것은 감옥이 아니라 직장을 잃는 것"이라고 주절대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자본의 힘이 법의 힘을 압도했노라고 기록한다.


- 훗날 노동당 좌파의 대부 베번Aneurin Bevan의 부인이며 역시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제니 리Jennie Lee는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오웰을 만났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스페인 내전 첫해, 바르셀로나 한 호텔에 친구와 머물던 나를 키 크고 여윈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작가이며 독립노동당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운전기사든 무엇이든 하겠지만, 무엇보다 전선에서 싸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의구심이 들어 영국에서 가져온 소개장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당연히 그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기가 돈을 들여 왔다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그가 기존의 어떤 정치적 · 사회적 진영에도 소속되지 않은 (…)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마지막 날까지 조지는 더할 나위 없이 진실되고, 깊은 자상함을 지녔으며, 민주사회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이 생의 마지막 소유물까지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의 불안은 자신이 사회주의자이면서 또 뼛속 깊이 자유주의자라는 점이었다. 그는 심지어 사회주의 조직 내에서조차 일체의 통제를 혐오했다.


- 바르셀로나를 벗어나기 직전에 경찰의 급습을 미리 통보받지 못했다면, 두 사람을 결국 스탈린의 감옥에서 살해당했을 것이다. 탈출한 지 3일 후에 발렌치아의 '국사범 재판정'에 보고서 하나가 제출되었다. 거기에 나열된 일련의 혐의들 - 아일린과 그녀의 남편에 덧씌워진 - 은 당시 두 사람이 느꼈을 공포와 오웰과 그의 동료들이, 한편이 되어 파시즘과 싸워야 할 사람들에게 의해 어떻게 배반당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다.


- 역시 문제는 사회의 상층부를 점유한 조직된 정치엘리트였다. 오웰은 스탈린의 패권주의에 놀아나는 좌파언론과 지식인의 기만과 위선이 일상화된 현실을 보면서 프랑코의 부르주아 진영이 승리할 것으로 확신했다. 


- "정서적으로, 나는 명백한 '좌파'이다. 그러나 작가는 정당정치에서 자유로울 때만이 진정으로 정직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일찍부터 좌파지식인의 위선적 행태를 고발해왔던 오웰은 이제 평화주의와 소련모델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주류적 사회주의 진영과 사고로부터 재차 격리시켰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가장 치열한 비판자가 됨으로써 차후 수많은 러시아 사회주의 동조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1940년 초에 신혼시절부터 살았던 월링턴을 떠나 런던으로 이사했다. 당시는 독일의 런던대공습the Blitz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던 급박한 상황이었고, 누구나 되로록 런던을 떠나려 하던 때였다. 따라서 오웰이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이 시기 그의 일련의 행태로 짐작하건대, 런던의 보통사람들이 겪을 고난에 동참하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투원 지원에 실패했던 그는 런던에 오자마자 차선으로 방위군Home Guard에 합류했다. 역시 자원이었다. 


- 전쟁 발발 3년에 접어들자, 역사가 A. 토인비와  E. H. 카를 포함한 수많은 학자와 작가들이 정부부처나 BBC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전쟁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오웰도 BBC 해외사업부 인도국에서 1941년 8월 18일부터 1943년 11월 24일까지 대담제작자Talks Producer로 근무했다. 


- 우리는 소련에 대한 오웰의 극렬한 증오를 보지 못한다면,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오웰은 스페인에서의 진정한 혁명운동이 스탈린에 의해 완전히 질식된 것을 경험했다.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러시아 체제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 체제적 악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했고,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권좌에 있어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스탈린은 신이었고 러시아혁명은 신성한 아우라를 부여받았지만, 러시아는 혁명 전보다 평등주의적 사회주의로부터 훨씬 멀리가 있었다. 혁명은 실패했고, 실패한 혁명을 전파할 명분도 근거도 사라지자, 남은 것은 무력정복을 통한 권력의 확대였다. 소련은 세계혁명의 이상을 포기한 듯 보였지만, 실은 '혁명'이 점차 '정복'의 의미를 띠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오웰이 거부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러시아혁명이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스탈린의 배반을 퐁자함으로써 민주사회주의의 진정한 적들에 대한 정면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철학자 로티Richard Rorty는 "좌파정치토론의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세련된 성격을 (…)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20세기의 역사를 재진술함으로써, 공격했다"며 『동물농장』을 아낌없이 칭송했다. 


- 한 서평에서는 "정직한 예술가란, 선동자이며 무정부주의자이며 방화자"라는 대담한 진술과 함께 문학과 사회화의 고통스럽고, 그가 보기에, 거의 해결 불가능한 관계를 요약했다. 불의와 궁핍이 넘치고 죄의식이 가슴을 찢는 이 시대에 "제임스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처럼 삶에 대해 순전한 미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 오웰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엘리엇 - 오웰은 엘리엇이 영국국교회로 귀의한 이후 시가 형편없어졌다고 혹독하게 비판했었다 - 이 늘 끼고 살았다는 단테의 『신곡』을 읽었고, 임종했을 때 그의 머리맡에 있던 책들 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 있었다. 


- 오웰의 유언에 따른 묘비명은 단출했다. "에릭 아서 블레어 여기 눕다. 1903년 6월 25일 출생, 1950년 1월 21일 사망."


- 실은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자신의 트라우마 대부분이 형성됐고 한 사람의 일생은 어릴 때 경험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이는 다름 아닌 오웰 자신이었다. 


- 오웰이 예비학교 시절을 집중적으로 돌아본 것은 그의 긴 에세이 「그런 기쁨들」Such, Such Were the Joys에서였다. 그가 말년으로 추정되는 때에 가서야 비로소 그런 회고를 남겼다는 것은 예비학교 경험이 그의 삶과 글쓰기에 미친 영향의 위중함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는 최악의 횡포, 불행하고 끔찍했던 제도적 폭력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희생자victim -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오웰은 초등학생이었다 - 가 무력할수록 상흔의 그늘은 짙고 상처가 남긴 그림자는 길었다. 


- 이따금 말해지듯이, 오웰에겐 여성에 대해 수치심과 혐오의 양가적 감정이 평생 따라다녔다. 오웰이 나름대로는 적극적인 관심을 표했지만 대체로 실패로 끝났던 문제가 여성과의 관계였다. 그가 연정을 담아 보낸 편지는 퇴짜 맞기 일쑤였고 청혼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한마디로 여성들에게 오웰은 매력 없는 사내였다. 고지식한 사람이 종종 그렇듯, 이는 그의 내면에 형성된 남녀관계에 관한 어떤 고정관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 분명 플립의 인상은 온정이 넘치는 가부장적 가정에서의 어머니 혹은 아내의 그것과는 한참 멀리 있었다. 오웰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그런 가정을 그리워했지만, 물론 그런 가정이야말로 페미니스트들이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오웰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었던 플립의 모습이 어느 쪽으로 겹칠지는 자명했다.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하나같이 지적이지도 성찰적이지도 못하다는 점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가령 『버마 나날들』의 엘리자베스는 드러나게 속되고 천박했고, 『목사의 딸』의 주인공 도로시는 초보적 교리에도 무지한 맹목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며, 『숨 쉴 곳을 찾아서』의 힐더, 『엽란을 날려라』의 로즈메리는 모두 자신을 벗어난 일들에 관심이 없었고, 『1984』의 줄리아는 "허리 아래로만 반역자"였다. 개인적으로도 오웰은 여자문제에 관한 한 평생 방어적이었고 순탄치 못했다. 


- 당시 세인트 시프리언스는 신흥부자들 - 귀족과 달리 시골에 땅과 저택은 가지고 있지 못한 졸부들 - 의 자제들이 주로 다녔다. 부잣집 아이들은 휴가 · 차 · 집사 · 시골별장을 경쟁적으로 으스댔다. 계급이 주는 위화감이 날것 그대로 학생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가령 10대에 막 들어선 아이들이 출신히 모호해 보이는 동료 아이들에게, 런던 어디에 살아? 나이트브리지? 켄싱턴? 아빠 연수입은 얼만데? 집사는 있어? 요리사는? 용돈은 얼마 받아? 따위의 질문들을 심문관처럼 퍼붓기 예사였다. 특히 스코틀랜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한없이 왜소해졌다. 스코틀랜드야말로 부자만이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곳, 가난한 집 아이로서는 결코 갈 수 없는 동경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을 가장 먼저 간파한 쪽은 부잣집 아이들 자신이었다. 부자들은 계급 구분이 확실하게 고착된 다음에야 계급에 무관심한 듯 자비로워졌다. 예비학교의 한시적이고 제한된 공간 속에서 졸부 자식들은 자기 아버지의 부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었고 누구보다 앞서서 계급적이었다. 


- 오웰은 자기 소유의 크리켓 방망이를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삼보의 입에서 나온 "네 부모는 그것을 살 능력이 없어"라는 말은 학창시절 내내 오웰을 따라다녔다. 


- 그렇다고 예비학교 시절이 온통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오웰은 기질적으로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윌리엄 새커리, 러디야드 키플링, H. G. 웰스, 버너드 쇼 등을 즐겨 읽었고, 독서 외에도 소풍 · 수영 · 곤충채집 · 산책 등에서 사소한 즐거움을 맛봤다. 좋은 기억의 대부분은 주로 자연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특히 그는 동물을 좋아했는데, 야채와 화초를 가꾸는 일과 더불어 가축을 키우는 일은 그가 성인이 돼서도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 1917년 5월, 오웰은 그의 14번째 생일 바로 직전에 전통의 명문사립고인 이튼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운이 좋게도 장학금을 받았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이튼에서 배운 것도 별로 없었다." 오웰은 자신의 이튼 생활에 대해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튼이 영국사회에서 점한 위상에 비추어볼 때, 이는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 "사회주의란 것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노등계급이 인간이란 개념도 내겐 낯설었다 (…) 잭 런던 등을 읽으며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 고뇌할 수는 있었지만 (…) 그들에 가까이 있을 때마다 느꼈던 혐오와 경멸의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말투는 역겨웠고 몸에 밴 그들의 무례함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 내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나머지 절반은 버스기사의 무례함을 격하게 성토하면서 보냈던 것 같다." - 오웰


- 그것은 버마 시절이 그가 영국제국주의의 최전선에 배치된 권력자(가해자)의 입장에서 권력의 실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는 점이다. 학창시절의 상처를 통해 권력과 제도의 폭력성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떴던 오웰에게, 버마 체험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무엇으로서의 권력"을 내면화시키는 전환적 계기였다. 


- '평등 없는 친밀성'intimacy without equality


- 핵심은 제국주의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백인과 유색인 간의 친밀성 위에 구축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 오웰에게 버마어 습득은 버마인과의 '친밀한' 교류를 위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수록 오웰은 친밀함이 관계의 주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의 본질을 은폐하는 도구임을 깨닫는다. 


- 오웰에 따르면,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의 글 쓰는 동기도 "편듦의 정서" 혹은 "불의에 대한 인식"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윤리적 행위로서의 글쓰기를 직접적으로 옹호한 것이었다. 


- 『버마 나날들』은 영국제국주의의 실상에 관한 현장기록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정치적 각성과 반성을 유인하기 위한 지식인 오웰의 '행동'이었다. 


- 제국경찰의 단조로운 업무, 동료들과의 일상적인 대화, 버마인들과의 정신적 · 육체적 교류 등은 모두, 그 저변을 흐르는 사회적 불평등이 당시의 오웰조차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가정될 때, 끔찍한 소외의 현장일 뿐이다. 친밀성조차 백인들의 필요(시혜)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종적 편견이야말로 '평등 없는 친밀성'의 근원적 배후였던 것이다. 오웰에게 그것은 '열등한' 인종에 대한 무제한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잇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터였다. 영국제국주의에 담긴 위선의 이러한 본모습이야말로 제국경찰 오웰이 짊어진 절망감의 근원이었다. 


- "5년 동안 나는 억압적 체제의 일부였고 이는 내 양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수많은 얼굴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 나는 내가 속죄해야 할 엄청난 죄의 무게를 느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결코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일을 5년동안 해왔다면, 당신도 아마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 나는 내가 제국주의뿐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배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자신이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로 곧바로 들어가서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자들과 싸우기를 원했다 (…) 그 당시 내게는 실패만이 유일한 덕목으로 보였다. 이제 내게 세상의 모든 출세success는 (…) 약자를 짓밟는 것과 다름없는, 추한 것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 오웰


-   1927년 8월 말, "실패자" 오웰은  영국에 돌아왔다. 그의 첫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의 미국판 책표지에 실린 짤막한 작가소개란에는 버마경찰직을 사임한 주된 이유가 "같은 환경이었다면 자신도 저질렀을 바로 그 일을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감옥에 넣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오웰은 더 이상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경찰로서 그가 했던 일들, 나아가서 영국제국의 일원으로서 영국이 저지른 죄상은 어찌할 것인가? 지나가버린 일들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 요컨대 오웰이 버마를 떠났다고 해서 버마가 그를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버마 경험에서 사회를 보는 하나의 분석틀, 곧 억압자와 피억압자 혹은 가해와 피해의 관계에 관한 관점을 배웠다. 그 틀을 마음에 새긴 채 조국의 당대 자본주의사회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19세 나이에 버마경찰을 지원했던 일이 실수였다면 무엇보다 그것은 그가 강자와 연합해서 약자를 억압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세인트 시프리언스와 버마에서의 경험은 경제적 부富뿐 아니라 성공 · 경쟁 · 승리 등의 가치에 대한 혐오, 가난과 실패에 대한 찬양, 그리고 수치와 죄의식의 내면화를 가져다주었다.


- 1930년대 중엽의 대표적 (좌파) 참여시인인 오든W. H. Auden은 「스페인」Spain이라는 시에서 스페인 전장에서 군인들의 죽음을 (공산주의라는 대의를 위한) "필요한 살인"으로 묘사한 바 있었다. 오웰은 순수-참여 문학에 관한 탁월한 시대적 통찰을 담은 장편에세이 「고래 뱃속에서」를 통해 그런 유의 시는 살인을 그저 하나의 추상적 단어로 접한 사람들만이 쓸 수 있다고 혹독히 날을 세운다. 히틀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이 살인 대신 '청산' '박멸'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대량살상을 탈도덕화시키며 정당화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살해된 사람들의 시신들을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목격한 사람들에게 살인은 공포, 증오, 친척들의 울부짖음, 사체해부, 피, 냄새 등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살인은 칭송의 대상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통상 느끼듯, 적극적으로 회피되어야 할 무엇일 뿐이다. 

그리하여 오웰은 또 내려갔고 또 섞여들었다. 그는 버마를 떠난 이후 호텔에서 접시를 닦았고, 노숙을 했으며, 홉을 따고 손수레를 끌었고, 부랑자들과 함께 떠돌았다. 오웰은 밑바닥 삶의 구체성을 체화시킨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경험들이 문학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학을 위한 경험이라기보다는 경험의 결단이 결과적으로 그의 문학을 위해 기능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삶이 언제나 먼저였고 글쓰기는 그러한 삶의 일부 혹은 연장이었다. 그는 내려감으로써 평등의 조건을 만들었고 비로소 '평등 없는 친밀성'의 모순에 다가갈 수 있었다.


- 오웰은 스스로 좌파이면서 좌파의 이율배반을 누구보다도 견디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오웰은 인류가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와 같은 "권력(자)을 위한 권력"의 체제 · 제도 · 구조로 불가피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예감에 갇힌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본주의 문명의 지속적 타락(경향)에 대한 부단한 경고와 더불어 그것의 총체적 구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급진주의자였고, 자신이 인식했던 문명사적 흐름과는 정반대의, 보통사람들의 존엄decency이 구현되는 사회를 갈망했던 이상주의자였다.

오웰은 영국제국주의의 최전선에 배치된 제국경찰이었고, 계급적으로는 중산층 (오웰 자신의 표현으로는 하위 상층 중간 계급 lower-upper-middle-class)에 속했으며, 그가 죽기까지 비판의 예봉을 놓지 않았던  지식엘리트의 일원이었다. 가해 진영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급진주의는 권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속죄를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무자비할 정도의 엄격한 삶의 태도, 특히 '내려감'descending의 혹독한 체험들 그리고 거기에 바탕한 엄정한 글쓰기에서 현저하게 드러났다. 


- 30년대 초에 오웰이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시대는 너무 혐오스럽기 때문에 때때로 나는 길모퉁이에 서서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아나 에스라처럼 하늘로부터의 저주를 퍼붓고 싶어져."


- 오웰은 전쟁이란 본래 반인륜적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전쟁이 정의롭다거나 인도적일 수 있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역사는 전쟁과 관련한 국가 간 협약들이 당사국 일방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고 철회될 수 있음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전선의 무장한 군인을 칼로 찌르면 당연하고 후방의 일반 시민들을 살육하면 비인간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폭격으로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파열된 시체가 세균전이나 가스전에서 사망한 사람보다 덜 참혹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본래 야후와 같고 전쟁이란 원래 잔혹하다는 것, 그 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좀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이나마 꿈꿀 수 있다. 


- 오웰에 따르면, 내일은 모두가 선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은 사기다. 그에게 평화주의는 영국적 위선의 고급한 변형에 불과하며 지대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물질적 · 신체적 안락에 취한 자들의 자기변명이다. 전쟁에서 중립이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차악을 택해서 보통사람들의 품위가 다시 가능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 그는 자신의 가장 긴 에세이 「찰스 디킨스」에서, 대부분의 "혁명주의자가 잠재적 보수주의자"인 것은 "사회의 틀을 바꾸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정상화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계급구분을 철폐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혁명적 입장이 지닌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는 내밀한 확신에서 나온다." 어떤 종류의 악들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회가 그 외형만 바꾸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오웰이 상상했던 것은 "문명이 종말을 향하고 있고, 10년 안에 혁명이나 기근 같은 끔찍한 재앙이 닥치거나 전면적 기업합병과 포드주의적 생산으로 전 인구가 온순한 임금노예로 전락하고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은행가들의 손에 떨어지는" 공포였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의 이런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요컨대 희망은 손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반드시 투쟁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투쟁은 애초에 지식인의 몫이 아니었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프롤proles에 있다." 오웰은 보통사람들의 열망과 저항에서 진보의 싹을 보았던 것이다. 


- 오웰의 급진성은 그가 계급협력의 가능성을 불신했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계급관계의 본질이 탈취와 수탈에 있다면 도둑이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새사람이 될 이유가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계급타협은 거의 언제나 배반으로 끝났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었다. 


- 1930년대 파시즘에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된 인민전선(Popular Front)의 계급협력 전략은 결국 자본진영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 뿐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웰은 당시 영국에 전해오던 5행시를 인용하여 이를 요약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젊은 여인이 있었네 / 그녀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 여행을 떠났다네 / 그들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 그 여인은 호랑이의 뱃속에 있었고 / 호랑이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네" (There was a young lady from Niger / Who went for a ride on a tiger. / They returned from the ride / With the lady inside / And a smile on the face of the tiger)


- 그리하여 오웰이 평생 자신의 삶과 글쓰기에 부과했던 무자비한 엄정함은 가해자로서의 속죄와 더불어 피해자의 해원을 위한 일종의 길고 고독한 여정으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오웰의 버마 체험은 그로 하여금 사회를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점에서 제국주의적 경험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 그리고 삶 자체의 핵심적 모티프였다. 그에게 버마 시절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역을 일상적으로 상상하면서도 결코 그러한 상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던 한 지식인 제국경찰의 고뇌 어린 기간이었다. 


- 어제나 사회는 주인인종과 하인인종, 소수의 낯선 지배자와 그에 의해 억압당하는 다수의 피지배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영국의 노동계급은 백인 원주민일 뿐이었다. 유럽의 노동계급이야말로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겪는 꼭같은 역할을 유럽에서 수행하는 불의의 희생자였다. 버마에서는 버마인이 되지 않는 한 피해자가 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는 인종적으로 또 권력적으로 불가피하게 가해 진영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버마와 제국경찰직을 떠난 후 "인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인간의 지배를 거부"하기로 작정하자, '실패'의 길을 걷는 선택이 가능해졌다. 그는 낮아졌고, "자신의 조국에서 원주민이 되었다."


-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가운데 제일弟一은 그와 함께 있는 것이라 했다. 오웰의 차후 행적을 보면, 그의 낮아짐은 문학적 소재를 얻기 위한 것 이상이었다. 그에게는 가난한 자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정직한 욕구가 있었다. 그리하여 오웰은 전통적 의미의 "성공한다는 것"을 가증한 오만으로 규정하고 자기생애를 '포기'renunciation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 오웰은 자신이 사회최하층의 가장 혐오스러운 세계를 오랜 세월 체험했고, 두껍고 성긴 모직 재킷을 입고 독한 파이프용 담배를 종이에 말아 피우며, 차를 접시에 부어 마시는 등, 노동계급의 습관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자신의 출신계급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 "나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죄의식에 관한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오웰


- "내가 발표한 모든 글들은 사실상 적어도 두 번을 쓴 것들이며, 나의 모든 책들은 세 번씩 썼고, 개별 문장들은 5~10회 다시 쓴 것들이 수두룩하다." 말년에 가가이 가서 쓴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는 "책을 쓴다는 것은 사람을 탈진시키는, 끔찍한 투쟁이다. 그것은 어떤 고통스런 병고를 오래 앓는 것과 같다 (‥·) 우리는 우리의 개성을 끊임없이 소멸시키지 않으면 읽을 만한 글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 요컨대 이 책이 오웰의 생애와 저작을 관통하는 철학적 입장을 '급진적 비관주의'로 규정한다면, 거기에는 인류의 암울한 전망에 대한 깊은 사색과 기존 체제의 구조적 변화와 보통사람의 가치의 복원에 대한 염원뿐 아니라 피해/가해자의 일원으로서 한 지식인의 수치/죄의식에 대한 속죄와 해원의 방식으로서 내려감의 체험 그리고 모진 글쓰기의 자기규율이 모두 들어 있다. 오웰은 권력의 문제를 위요한 가해와 피해의 실상을 밝히고 보통사람들의 존엄을 구현하는 데 최대의 관심을 보였던 정치적 작가였다. 그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처럼 당대 문명의 대파멸을 예언하는 비관주의자였고 그것의 총체적 변화를 꿈꿨던 급진주의자였지만, 특정한 대안이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오웰이 특유의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이 지닌 상식, 일상적 기쁨의 힘, 품위를 회복한다는 희망을 호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래에 대한 나의 주된 희망은 아직까지 보통사람들이 그들의 도뎍률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웰의 간결, 명료하고 평이한 문체도 모든 지식은 상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정, 상식이란 아주 평범한 타인들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지식인들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전체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오웰이 보기에 지식인은 권력을 지니거나 권력을 추구했으며, 늘 권력 주변을 서성댔다. 그가 지식인과 지배계급을 동일시했던 이유다. 그는 지배층의 오만과 위선을 경멸하듯 지식층의 오만과 위선을 경멸했다. 


- "나는 13살에 키플링을 좋아했고, 17살에 미워했으며, 20살에 그를 즐겼고, 25살에 경멸했으며, 이제 다시 그를 숭앙하는 편이다. 그를 읽으면, 그를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오웰.


- 권력자의 선함에 의지하여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었다. 분산되거나 견제되지 않은 권력은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의 토대로서 제국주의가 함축하는 권력적 질서는 평등의 원리로 대체돼야 한다는 것이 오웰의 믿음이었다. 


- 영국인들이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위해가 가해질 가능성이 없는 한에서였다. 제국주의에 대한 인민적 저항도 제국이 실제로 위협받는 순간에는 결코 힘을 발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영국의 좌파는 반파심을 위한 연대를 외치는 중에도, 제국 내부의 유색인 문제는 고려하기를 꺼렸다. 


- "보통사람 모두를 하나로 묶는 특징은 '무력함'이다. 사람들은 권력이 없을 때만 품위가 있다. 지식인이 보통사람이 되기 힘든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오웰


- 문제는 계급이었고 계급의 핵은 부였다. 돈은 선함과 동의어였고, 도덕적 덕목과 동의어였으며, 부자와 강자는 같은 말이었다. 그들은 늘 이겼고 이기는 것이 덕virtue이었다. 도덕을 대리인으로 둔 그들에겐 승리할 자격과 권리가 있었다. 자본주의는 부자에게 도덕적이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도덕적이었다. 인생은 위계적이었고 일어난 일은 언제나 옳았다. 

오웰이 죽을 때까지 희구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회주의는 어떤 이론적 동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난이 자신과 타인에게 빚은 상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터잡은 것이었다. 말년에 오웰은 1930년이 돼서도 자신에겐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가난을 겪으며 기록하며, 세월과 더불어 '사회주의적'으로 되어갔다. 


- 오웰의 사회주의는 피해자와의 물리적 대면에서 시작되었다. 버마 직후 그의 삶과 글은 온통 가난과 얽혀 있었다. 그는 가난을 정면에서 마주했고 정직하게 기록했다.


- 오웰에게 가난이 주는 최악의 효과는 정신의 붕괴였다. "굶주림은 영혼을 좀먹는다."


- "그들은 대화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하지 않는다. 위가 비어 있으면 영혼은 사고를 멈추기 때문이다 (…) 다음 끼니가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므로, 다음 식사를 걱정하는 일 외에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 (…) 대부분은 이 음침한 방에서 10시간을 지속해서 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견딜까. 나는 지루함ennui이야말로 떠돌이가 겪는 끔찍한 일들 가운데 최악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것은 배고픔이나 불편함보다 더 나빴고, 사회적으로 모멸을 받는다는 끊임없는 자기비하도 그보다는 덜했다. 무식한 사람을 아무 할 일 없이 하루 종일 가두는 것은 어리석고도 잔인한 일이다. 마치 개를 묶어서 통 속에 가두는 것과 같다. 스스로 위로할 만한 것들을 내면에 지니지 못한 (…) 대부분이 무식한 떠돌이들은 지적 능력이 결여된 텅 빈 정신으로 가난을 대면해야 한다. 10시간 동안 불편한 벤치에 들러부터 있는 그들에겐 집중할 대상이 없다 (…) 그들 내부에는 지루함의 공포를 견뎌낼 만한 어던 것도 없다. 인생의 대부분을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기 때문에 지루함이 주는 고뇌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 오웰


- 자본주의의 핵심내용을 구성하는 재산권(행사)의 자유는 결국 행사할 만한 재산권을 소유한 사람들의 자유일 뿐이지만, 자유를 탈취당한 이들에게도 인간은 남는다. 숙소에 들어올 때 담배를 몰수당했던 떠돌이 스코티는 나갈 때 지난밤에 몰수됐던 담배를 돌려받고는 오웰이 몰래 쥐어주었던 담배꽁초를 기억해낸다. "그는 헐떡거리며 내 뒤를 쫓아와서는 축축하고 흉하게 뒤틀린 꽁초 4개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 특히 오웰은 그 책(『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묘사가 어떻게 사회적 질문들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가령 러시아 출신 웨이터Boris의 '웨이터철학'을 포착해내는 저자의 시선은 예리하다. 웨이터들은 부자 손님을 멸시하기보다는 부러워했다. 그들의 야망은 손님들같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공신화는 끊임없이 선전되고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현실이었다. "웨이터들 가운데 좀처럼 사회주의자를 찾기 힘들고, 그들에게 이렇게 할 노조 조직이 없으며 (…) 그들이 15시간의 노예노동을 오히려 흡족해하는" 이유였다. 오웰은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불위한 사회체제의 무기력한 희생자로 보기보다는 성공하지 못한 자본가로 간주한다는 점을 그때 깨닫는다. 


- "문제는 돈의 결핍이 아니다 (…) 사람들은 돈이 없어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 산다. 그 세계에서 돈은 덕이고 가난은 범죄다 (…) 치명적인 것은 돈을 숭배하는데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 가난의 첫 번째 효과는 그것이 생각을 죽인다는 것이다. 무일푼이 된다고 돈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다 (…) 가망 없는 돈의 노예가 된다." - 오웰


- 오웰은 자기 발치의 좁은 침대에 누워 죽음보다 더 참혹한 시간을 보내던 간경변 환자를 보면서 "곧 해부학 교실로 운반돼서 평판 위에 던져질 이 혐오스러운 폐물 조각이 바로 성당의 기도문에서 우리가 기원하는 '자연'사의 사례라는 생각"에 몸서리를 친다. 그러고는 "지켜보는 이, 관심 갖는 이 아무도 없고, 아침이 올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는 이 없이 짐승처럼 죽어간" 그의 죽음 앞에서 빈자들에겐 자연사가 아니라 돌발적인 횡사나 난폭한 죽음이 오히려 더 낫다고 깨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난에 사무친 자만이 기록할 수 있는 정경이었다. 


- 사실 오웰에게는 글쓰기 자체가 정치적 행위였다. 따라서 늘 현실정치의 밖에 있었지만, 임종 직전까지 '정치적'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를 오히려 평생을 정치에 헌신한 인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지 모른다. 『위건 피어로 가는 길』은 기록 자체가 지식인의 의무임을 보여준 1930년대 최고의 르포르타주이다. 


- 훗날 『동물농장』의 상업적 성공으로 경제적 난관에서 벗어난 후에도 그는 거친 올의 코르덴 바지와 낡은 트위드 재킷, 두껍고 어두운 빛깔의 비옐라 셔츠 그리고 헤진 타이와 빛바랜 구두 차림을 고수했다. 그의 친구 우드콕은 그가 양복을 입거나 중절모를 쓴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아마 오랜 기간의 자발적 빈곤이 검소하고 단출한 삶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했고 부르주아적 삶에서 드러나는 과시적 요소들을 경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불행히도 계급장벽은 원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 계급구분의 철폐는 곧 우리의 일부를 소멸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일원인 내가 계급구분을 제거하길 원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이 계급구분의 산물임에랴. 선과 악, 호와 불호, 재미와 진지함, 추함과 아름다움에 관한 나의 모든 관념들은 기본적으로 중간계급 관념들이다. 독서, 음식, 옷에 대한 나의 취향, 도덕관, 식사예절, 말투, 악센트, 심지어는 나의 특징적인 몸짓조차 특정의 양육 그리고 사회적 위계 안에서 점유된 어던 특정의 지점의 산물들이다. 이 점을 이해하면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리며 그도 나와 꼭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알게 된다." - 오웰


- 오웰이 가장 경멸해 마지않았던 대상은 오히려 스스로 계급적 뿌리를 이탈했다고 떠드는, 정직하지 못한 중산층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탈린의 소련을 변론했고, 자신들의 구체적 삶이야 어쨌든, 스스로를 노동계급과 동일시했다. 


- 오웰이 확신했던 사회주의는 일종의 '품위decency 사회주의'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잉글랜드 북부 노동계급의 가치체계에 근거한 하나의 신화 같은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북부의 노동계급 가치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중간계급이 자신의 이익과 가치를 노동계급에 연대시킬 때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다. 핵심은 돈보다 가치였다. 혹은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경제보다 윤리였다. 


- 오웰에 따르면, 권력과 특권을 쥔 소수는 쉽게 제거될 수 없을 뿐 아니라not easily removable, 도무지 배우려 들지 않는다not teachable.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고수할 뿐 아니라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는 철학을 구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오직 보통사람(의 저항)에 있다. 


- 대부분의 사람은 불황과 실업보다는 차라리 국가통제를 원한다.


- "돈과 특권의 힘"이 민주주의에 가하는 치명적인 해악을 오웰처럼 철저히 인식했던 인물도 드물다. 부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선거는 유권자에 대한 직간접적 뇌물공여로 오염되며, 공동체의 거의 모든 문화적 · 지적 삶의 수단들, 곧 신문 · 책 · 교육 · 영화 · 라디오가 특정 사상의 만연을 방지하는데 강력한 동기를 지닌 부자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데, 일주일 내내 장시간의 노동과 고용주의 전제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5년마다 찾아오는 선거, 정치적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웰은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못 박았다.


- "만일 사회의 경제구조가 불의하다면, 법과 정체체제는 그러한 부정의를 영속화시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법제도 심지어는 만병통치약인 '교육'을 뜯어고친다 할지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 부자들이 최고의 변호사들을 돈으로 살 수 있는 한, 법 앞의 평등이란 공허한 헛소리이다 (…) 만약 민주주의가 인민의 지배를 의미한다면, 영국은 민주국가가 아니다. 영국은 카스트 제도의 망령이 출몰하는 금권주의 나라이다." - 오웰


- 인간이 만든 체제란 - 자본주의를 포함하여 - 통상 구조적 악이라고 불리는 체제 차원의 문제를 지니기 마련인 한,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고 또 해야 한다. 하지만 오웰이 보기에 모든 체제가 악하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난센스이며 도덕과 정치에서 허무주의를 낳을 뿐이다. 


-  돈의 지배는 "늙은이들"에 의한 지배를 의미했고, 노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그들이 싸우는 적을 간파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파시즘의 속성을 몰랐다. 파시즘을 알려면 사회주의를 공부해야 하고, 사회주의를 알면 당대의 경제체제가 얼마나 부당하고 비효율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것인지 깨닫게 되겠지만, 그들은 이런 사실을 "대면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그들은 1914년 기병장군이 기관총을 대한 것처럼 '무시함으로써' 파시즘을 상대하려 했다. 


- 지배계급은 히틀러와 싸우면서도 히틀러를 내심 숭앙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를 볼셰비즘을 막아주는 보호자로 간주했다. 그들이 고의로 조국을 배반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그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춤하게 했고, 공격을 거둬들이게 했고, 잘못된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

  스페인공화국 정부로 식량을 나르던 영국 선박이 이탈리아의 공급으로 피격됐다는 뉴스에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미친 듯이 환호하는 섬뜩한 광경이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프랑코가 스페인 정부를 무너뜰는 것을 방관했고, 봄이 오면 이탈리아가 영국을 공격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나 예측하던 상황에서 1939~49년의 겨울 내내 전쟁물자를 이탈리아에 실어 나르며 이익을 챙겼으며, 불과 수십만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인도를 동맹국에서 적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전쟁이 이렇게 부유한 계급의 통치하에 수행되는 한, 전략은 언제나 방어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승리는 현상의 변화를 의미하는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제국주의의 뿌리에는 인종문제가 있다 인종문제는 본질상 계급문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다. 영국노동자 한 사람이 담배에 지출하는 돈이 인도 농부 한 사람의 모든 소득과 같은 액수일 때, 백인 노동자와 유색인 노동자의 연대의식 혹은 국제연대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아시아인의 눈으로 보면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은 허위이기 십상이다. 아시아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 사이의 생활수준의 차이가 지금처럼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는 유럽의 백인들 내부에 존재하는 계급차이나 소득불평등은, 동양의 쿨리 쪽에서 보면 지극히 하찮게 보일 것이기 때묺이다.

  실제로 사회주의 운동은 아시아 · 아프리카, 심지어는 미국 흑인들 사이의 어디에서도 진정한 발판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도처에서 민족주의와 인종혐오에 의해 곁길로 빠졌던 것이다. 당연히 해결은 수많은 유색인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백인의 극것으로 격상시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오웰의 논리요 입장이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적어도 잠정적으로 유럽인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좌우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정치인들 모두가 회피로 일관하며 거론하길 꺼려운 주제였다. 


- 히틀러의 통일유럽 구상은 일종의 카스트 체제를 도입해서 독일은 지배카스트가 되고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노예종족으로 되는 것이었다. 그때 삶은 낮은 수준에서는, 과거의 노예나 농노에게 그랬던 것처럼, 안전security이 제공될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의 부상浮上 자체가 사람들이 자유보다는 안전을 택한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파시스트들은 사람들이 자유보다는 안전을 좋아한다는 심리를 활용하여 반동적인 카스트 체제를 구축하려 하는 것이다. 오웰은 이를 선제하기 위해 국내개혁, 특히 부정의不正義의 일소, 지배계급의 기득권 타파, 제국주의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회민주적 조치들이 전쟁노력의 불가결한 일환으로 도입돼야 한다고 믿었던 급진주의자였다. 


- 원래 중간계급은 기존 질서로부터 얻는 것도 없고 사회주의로의 전환에 의해 이렇다 하게 영향받을 것도 없었다. 현실에서 그들이 자연적 동맹세력인 육체노동자에 적대하여 자본계급의 편에 서는 경향을 보여온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걸 부추기는 교육제도와 사회주의 선전의 구태의연한 안일함 때문이었다. 


- 실제로 도덕주의적 열정이야말로 오웰의 삶과 글쓰기의 원동력 아니었던가. 가령 문체와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도 도덕주의 혹은 도덕적 염결성廉潔性과 무관치 않거니와, 문체와 언어를 포함한 오웰의 글쓰기 자체가 "문학의 진정한 목적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확신 위에 서 있었다 (…) 그의 사상적 각성은 늘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 부랑자 숙소, 감옥, 잉글랜드 북부의 폐광도시들, 스페인 전서 등 숱한 현장을 경유한 것이었다. 그는 진리 앞에서 - 곧 현장을 대면하는 데 - 때때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목숨이 위태롭다는 이유로 상황을 피하려하지 않았다. 버마 시절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고, 현장이 주는 '희열' 또한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오웰 연구가인 P. 바운즈가 말했듯이, 그것은 "고전적인 낭만적 외부자"classical romantic outsider의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한다. 오웰은 버하 행,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 영국 북부와 스페인으로의 여정, 그리고 인생 말년의 고독과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했다. 


- 오웰에 따르면, 사회구조의 변화가 그 자체로 진정한 진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혁명을 낳고 때로 그것은 병자가 침대에서 돌아움으로써 잠시 편안해지는 것처럼 한시적인 구원을 만들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 귀결은 "주인들의 교체"에 불과했는데, 왜냐하면 애초에 권력욕망을 제거하려는 어떤 노력이나 장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꼭대기에 앉은 명민한 사람들에 의해 이내 변질되고 배반되며, 그 와중에 새로운 지배계급이 성장하여 구 지배계급을 서서히 대체한다. 평등은 결코 도래하지 않고 대중은 자신의 본래적 품위가 주도하는 세상을 결코 갖지 못한다. 대중은, 통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실험하겠지만 실제로는 참호 · 저임공장 ·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사람들은 권력이 없을 때에만 품위가 있다는 냉소적 - 오웰에 보기엔 진리인 - 생각에 내몰린다는 것이다.

  서유럽 사람들에게 독일의 독재에 맞서는 러시아의 독재가 특별히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좌파이론가이며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라스키Harold Laski의 관찰은 이랬다. "오웰의 기본적 잘못은 (…) 자유와 정의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던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잘못된 믿음이다."


- 사회주의는 산업화된 서방국가들 속에서 자란 교의로서 백인 노동자를 위한 더 나은 생활조건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수탈당하는 유색국민들에 대한 해방을 요구한다. 이 두 목표는 양립이 불가했다. 좌파정당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공약하고 지지를 받지만 그런 조건은 쉽게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생활수준의 하락을 동반하는, 즉 좌파진영이 자기를 부인하는 길고 혹독한 싸움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간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은 이 모순에 대해 침묵하던가 소리를 낮춰왔다. 아니 그들은 영국이 과거보다 가난해졌고, 오랫동안 더 가난하게 지내야 하며, 어떤 소득재분배 조치도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 오웰의 관찰에 따르면, 지식인들은 파시즘에 반대하여 가장 요란하게 저항하는 듯하지만, 위기 시에 그들의 상당수가 패배주의에 함몰된다. 권력 쪽의 포섭 필요성과 협박 그리고 매수를 위한 거래들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 지식인의 생존방식이다 - 정교한 논리들이 공식처럼 뒤따른다. 실제로 나치는 지식인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고, 장기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데 익숙한 지식인은 쉽게 거기에 매수됐다.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보여주듯이, 권력에 가장 먼저 투항하는 계급이 지식계급이었다. 

  노동계급은 그와 반대였다. 그들은 파시즘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갈 정도로 무식하지만, 곧 다시 투쟁을 선택하곤 했다. 그들은 "항구적인 매수가 불가능한" 계급이다. 노동계급을 항구적으로 포섭하려면 일반적 생활수준이 향상돼야 하지만, 파시스트들에겐 그럴 능력도 의사도 없다. 노동자들은 파시즘의 공약公約은 실현될 수 없는 공약空約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들만은 모든 다른 계급이 굴복한 후에도 파시즘에 끝까지 저항한다. 그들이야말로 사회가 정상적으로 재건되면 가장 얻을 것이 많은 계급이기 때문이다. 오웰에게 그들의 투쟁은 식물이 자라는 것과 같았다. 식물은 보지 못하고 어리석지만, 빛을 향해 위로 계속 뻗쳐 올라가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노동계급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존엄한 삶decent lfe, 그것이 전부이다. 오웰이 경험했던 바, 스페인 내전에서 노동계급이 가장 열심히 싸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오웰은 도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입장은 왕왕 인기가 없었고 종종 시대에 뒤처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것을 견지하고 추구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윤리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오웰은 손수건 산업의 도덕성을 먼저 따진 후에야 코를 푸는 사람이었다. 


- "이 빌어먹을 전쟁에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니, 어떻게 하든 전쟁에 이겨야 한다." - 오웰


- 역사의 현단계에서 전쟁은 불가피했고, 이제 히틀러에 저항하는 것과 항복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실질적 대안도 없었다.

  오웰이 보기에 '제한'전쟁, '인도적' 전쟁 운운은 모두 순전한 헛소리였다. 국제협약 · 평화조약 · 불가침조약은 깨는 것이 유리하면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 전쟁이 전방의 젊은 군인의 살육에 한限하면 인간적으로 되고, 후방의 늙은 시민이 죽으면 야만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스전이나 세균전이 통상의 전쟁보다 왜 더 위험한가? 폭탄으로 인해 내장이 파열된 죽음은 어던가? 전쟁이란 본질상 야만적이고 전쟁의 결과는 늘 끔찍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 그는 일찍부터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를 믿지 않았다. 유럽 노동계급은 단결하여 파시스트 공격에 나서지 못했고, 노동계급의 국제주의는 늘 실패했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 당시 어느 나라의 노동계급도 스페인의 동료들을 위해 단 한 차례 파업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독일 노동계급을 향해 히틀러를 사보타주 하라는 호소를 하지 않은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사회주의의 국제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렇게 썼다.

  "어차피 우리는 폭력이 불가피한 세상에 살고 있고, 문명은 강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생존은 국가의 강제와 폭력에 기댄 것이고 (…) 우리의 생각(숭고한 입장 · 이념 등)과 생존(소득 · 부)이 실은 모두 무력이 뒷받침한 불의에 의존하고 있다 (…)  인류는 개인적 구원은 가능하지 않다는 엄정한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  인간 앞에 놓인 선택은 (…)  선과 악 사이의 그것이 아니라 두 개의 악들 사이의 선택이다. 나치가 세계를 지배하도록 놔두는 것, 그것은 악이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나치를 붕괴시키는 것, 그것 역시 악이다. 제3의 선택은 없으며, 어느 쪽을 택하든지 손을 더럽히는 것은 불가피하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차악을 택해서 보통사람의 존엄common decency이 다시 가능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뿐이다. 우린 불가피하게 어느 한쪽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비용을 계산하는 편이 낫다. 평화주의는 영국적 위선의 고급한 한 변형이며, 부패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 경찰과 배당 수익의 차이를 꿰뚫고 있는 유럽인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 오웰의 주된 관심은 도덕적 현상이나 이론으로서 평화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의 실제적 효과, 곧 그것이 적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 있었다. 자신의 방어를 위해 부력사용을 거부한 국가는 심지어는 개인에 의해서도 전복될 수 있다. 평화주의가 자국의 전쟁노력을 반대하는 한 그것은 적국을 돕거니와, 그리하여 평화주의가 히틀러를 돕는다면 평화주의는 반민주주의, 평화주의자는 전쟁주의자로 귀결되는 것이다 (…) 요컨대 평화주의는 오히려 폭력을 옹호하며 늘 권력숭배로 기운다는 사실이 오웰의 관찰이요 믿음이었다. 실제로 프랑스가 함락되자, 그곳 평화주의자들은 대부분 나치 쪽으로 넘어갔고, 작가들은 오웰이 보기에 파시즘의 지적 선조, 곧 영웅사관을 주창한 토머스 칼라인을 찬양하며 "성공한 잔인성"에 대한 숭배와 함게 평화주의를 선동했다.


- 간디는 변화를 가져올 일체의 물리적 행동을 언제나 반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영국의 인도통치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영국 정부가 그의 건강에 그리도 신경을 쓰고 웬만한 일에는 양보를 했던 이유도 반평화주의적인 인물이 그를 대체해서 나타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간디는 개인적으론 매우 정직했을지라도, 자신이 정치적으로 어덯게 이용당할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가령 그는 독일과 싸우기보다는 독일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오웰은 히틀러가 영국을 정복하면 간디는 전국적인 불복종운동을 전개할 것이지만, 전체주의하에서 그런 저항은 용납지되 않을 것이며 히틀러의 지배는 더욱 수월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오웰은 간디의 평화주의가 영국지식인들의 편협하고 위선적인 평화주의보다 훨씬 우월한 것임을 놓치지 않앗다. 간디 평화주의의 동기는 종교적이지만, 그것은 또한 원하는 정치적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적(영국)을 이기는 방법이었다. 간디는 폭력을 완전히 포기한 후에도, 그가 보어전쟁에서 그랬듯이, 전쟁에서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전 생애가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을 중심으로 엮어진 것 아니었던가. 간디의 평화주의는 모든 전쟁에서 양측은 똑같고 어느 편이 이기든 다를 바 없다는 영국지식인들의 무익하고 부정직하며 막무가내한 노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시작됐던 간디의 사티아그라하(Satyyagraha)는 일종의 비폭력 전쟁으로, 적에게 상처를 주거나 미움을 유발하지 않고 적을 이기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시민불복종, 파업, 철로에 눕기, 도망가거나 되치지 않고 경찰의 공격을 견뎌내기 등을 내용으로 했다. 간디는 그 단어를 '수동적 저항'(passive resistance)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것의 원래 의미는 진시에 굳게 섬'(firmness in the truth)이었기 때문이다.)


- 오웰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가시적인 폭력 혹은 비폭력이 아니라, 남을 강제하려는 권력적 욕구를 지녔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 그는 민족주의를 "인간은 곤충처럼 분류될 수 있고 수백만 혹은 수천만 명이 '선'하거나 '악'한 하나의 블록으로 확실히 지정될 수 있다고 가정하며 (…) 스스로를 단일의 국가 등과 일치시키고 오로지 그것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만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습관"으로 정의한다 (…)  무엇보다 민족주의는 권력욕구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민족주의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개성을 매몰시켜가며 국가 등을 위해 보다 많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한다. 민족주의자의 생각은 주로 경쟁적 권위의 관점에서, 즉 부정적이든 등정적이든 승리와 패배, 영광과 굴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그들은 역사 특히 당대사를 거대 권력체들의 끝없는 성쇠로 파악하며, 일단 자기편을 선택하면 사실과 다를지라도 그것이 가장 강하다는 신념을 고수한다.

  요컨대 민족주의는 자기 기만이 가미된 권력추구였다. 모든 민족주의자는 가장 극악한 위선을 행하면서도 자신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봉사한다는 의식으로 인해 스스로 옳다는 신념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오웰이 보기에 민족주의자의 의식구조는 평화주의자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 오웰은 영국문명에는 특징적인 무엇, 그 자신만의 고유한 향취, 하나의 산 유기체처럼 과거와 현재로 뻗어 있고 지속되는 무엇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영국민이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무엇이며, 때로는 미워하고 조소해도 이미 영혼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일정기간 동안 떠나 있으면 행복할 수 없는, 아니 그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한 어떤 표식들 - 예컨대 빨간 원통형 우체통, 음침한 일요일, 안개 낀 마을, 굽은 시골 길, 푸른 들판 같은 것들 - 이다. 


-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는 수많은 페미니스트 저자들이 오웰을 여성혐오주의자라고 비판한 데 대해 완강히 오웰을 변호했지만, 오웰이 그리는 모범적 가정과 그 가치들은 여성이 종속적 위치를 거부한다면 무너져내릴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 보통사람의 정서야말로 통상 진보가 놓치는 것, 그러나 히틀러가 포착하여 성공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그는 『나의 투쟁』 서평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히틀러의 독일 제국 구상 같은 황당한 것이 먹혀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오웰에 따르면, 히틀러는 개성이 발산하는 매력에 더하여, 쾌락주의적 인생관의 허구를 일찍이 파악했던 비범한 인물이었다. 모든 진보적 사상은, 인간은 편이 · 안전 · 고통의 회피만을 추구한다는 것을 암암리에 상정한다. 거기에는 애국주의나 군사적 용맹 같은 덕목들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의 음울한 정신의 저 안쪽에서 "인간은 오로지 안락, 안전, 노동시간 단축, 위생, 상식만을 원하는 존재가 아니며, 적어도 간헐적으로 투쟁과 자기희생, 북소리, 국기, 충성 퍼레이드 등을 원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히틀러는 "나는 당신에게 투쟁과 위험과 죽음을 제시한다"고 말했고, 처칠은 하원연설에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피와 노력과 눈물과 땀뿐"이라고 했으며, 19세기 이탈리아의 가리발디는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죽음"을 추종자들에게 요구했다. 이들은 모두 감정적 호소를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았던, 그리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움직였던 지도자들이었다.

  오웰은 '가장 평범한 정서'도 이해 못하는 '계몽된' 좌파지식인이 되기보다 유니온 잭을 보고 가슴이 뛰는 보통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평생 보통사람들과 섞이며 그들에 관해, 또 그들을 대변하는 글을 쓰면서 그들의 애국주의를 단 한 번도 의심치 않았다. 


- "전체주의의 가장 끔찍한 면은 그것이 저지른 잔혹생위가 아니라 객관적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다. 전체주의는 미래뿐 아니라 과거도 통제했다." 『1984』에서 진리부Min of Truth는 프롤Proles의 관심을 분산하고 품격을 저하시키기 위해 포르노를 살포하고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과학 교과서조차 왜곡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조직적 기만은 군사적 선전과 같은 한시적인 편의가 아니라 전체주의 사회에 본래적이었다.


- 오웰은 "자유란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할 권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정직하지 못하면 자유가 용납될 수 없거니와, "나〔오웰〕는 선전을 위해서라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 무엇보다 전체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위험한 것은, 그것이 돈 아닌 권력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돈이 아니라 권력이 중심가치로 된 새로운 종류의 전제였다. 오웰은 봉건주의가 끝날 무렵 '돈의 사람'man of money이 등장했다면, 자본주의 말기에 '권력의 사람'man of power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권력의 사람은 개인적으로 부패할 수 있지만, 하나의 유형으로서 그들을돈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뫠락적이지도 않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안락과 사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압제에서 오는 희열이다. 희생자나 약자의 관점에서 보면, 권력의 지배는 돈의 지배보다 더 나빴다. 왜냐하면 권력은 집중되는 경향을 지니며 돈보다 분할되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좌우 전체주의 모두 그 특징은 권력의 쟁취에 있다. 문제는 권력이지 특정의 사회형태가 아니었다. 


- 우리는 "이번 일로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지만, 현실에선 맥베스가 보여주듯이 우리 자신의 내부에 사악함이 더 커지지 않는데도, 하나의 범죄는 또 다른 범죄와 연결된다. 맥베스의 첫 번째 살인은 출세를 위한 것이었지만, 더 악독해진 잇단 살인들은 자기 방어의 차원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맥베스」는 종말이 예견되는 그리스 비극들과 같다."


- 오늘의 전체주의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항시적이고 정밀한 타압, 곧 그러한 탄압기제를 가능하게 할 과학기술의 고도 발전을 전제하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가능해진 특수한 형태의 권력유형이다. 오웰은 오늘의 상황은 중세의 암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하며, 과거 대심판관의 심문의 야만성은 과학에 의해 뒷받침된 현대전의 잔혹함에 비하면 아마추어적인 애교에 불과하가도 보았다. 


- 현대국가가 휘두르는 자원, 특히 현대전의 가공할 무기, 전파매체, 언론검열, 표준화된 교육, 비밀경찰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대중최면은 이제 과학이 되었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은 체계적으로 부인되고 있다. 『1984』의 세계는 그저 우려와 전망이 아니었다.


- 실제로 "노예제가 1942년에 눈에 띄게 돌아오고 있었다." 오웰은 묻는다. 오늘날 과연 노예제가 폐지됐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 누군인가. 역사의 소멸로서 노예사회에 관한 오웰읠 유비喩比는, 우리 모두 돈과 허위의식의 노예라는 개념을 훨씬 넘어서는 보다 원초적이고 원시적이고 물리적인 문제였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폴란드인 · 러시아인 · 유대인 · 모든 인종의 정치범들이 도로를 만들고 늪지에 무을 빼는 데 동원되며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최소한의 생존마을 허락받고 있다. 그것은 원시적인 노예사회에 다름 아니었다. 노예의 매매만이 없을 뿐, 예컨대 가족의 해체 · 파탄 등 조건들은 미국 목화농장에서보다 더 끔찍했다. 오웰로서는 전체주의적 지배가 지속되는 한 이런 상황이 변화하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 특히 지식인들 - 은 이것이 함축하는 바를 온전히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오웰이 보기에 사람들은, 아주 신비로운 생각의 습관으로 인하여, 노예제에 기초한 체제는 붕괴돼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문명사회에서 생겨날 수도 지탱될 수도 없는 야만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웰은 노예제에 근거했던 고대문명들이 4천 년 동안이나 지속됐다는 "섬뜩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노예제와 관련하여 그를 특히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은 엄청난 세월의 문명이 수천만의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면서도 그들 누구도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도 모른다. 그리스 · 로마를 통틀어서 우리가 아는 노예들의 이름이 있는가. 내겐 두세 명의 이름 정도만 떠오른다. 스파르타쿠스 · 에픽테투스 · 이솝 (…)  이보다 더 많이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머지는 완전한 침묵 가운데 사라져갔다." 그는 인류가 향하는 곳은 세계의 멸망이 아니라 노예제의 재등장이며, 노예제국은 고대의 그것처럼 가공할 안정성을 지닐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런 일반적 추세는 과학의 발전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었다. 


- 오웰이 전체주의의 가공할 위력과 현실성에 그토록 민감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모든 이념에 앞서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 오웰은 『동물농장』이 영국에서만 4개 출판사에서 출판이 거부됐고, 그런 일이 특별히 사악한 이유는 정부 검열이나 개입보다 여론을 두려워한 자발적 검열 곧 지식인의 소심함과 비검성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오웰에 따르면,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사실은 "법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범죄가 아니라 정치적 혹은 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처벌받는다. 그들이 행하고 행하지 않은 것은 무관했다. 평화주의자였던 오웰이 전쟁 지지로 돌아섰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시민권의 기본인 언론과 출판의 자유 때문이었다. 그런 자유는 한번 잃으면 복구가 힘들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전체주의하에서도 내면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믿음이었다. 말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다니엘 디포 자신이 사막에서 살았다면 『로빈슨 크루소』를 결코 쓸 수 없었을 것이고, 쓰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빼앗기면 창조적 능력도 마르거니와, 오웰에게 언론의 자유는 무엇보다 비판하고 반대할 자유였다. 


- 전체주의가 지식인에게 가장 큰 압력을 행사하는 곳은 다름 아닌 문학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이다. 오웰을 전체주의의 반문학적 귀결을 「문학과 전체주의」(1941)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가 전체주의 사회를 "폭탄보다 더 몸서리쳐 했던" 이유도 실은 전체주의가 문학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학과 문학비평의 생명은 지적 정직성, 곧 작가가 실제로 생각하고 느낀 것만을 기록해야 한다는 데 있다. 정직성은 근대무학의 개인적 성격에서 비롯되지만, 인류는 자율적 개인이 위협받는 전체주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것은 특정국가의 문제 아닌 범세계적으로 부딪치는 위험이다. 


- 소설이 프로테스탄트 예술유형, 곧 자유정신, 자율적 개인의 산물이라는 점이야말로 1930년대 최고의 작가들이 대체로 시인이었고, 로마 가톨릭 가운데 뛰어난 소설가를 찾기 힘든 이유였다. 1930년대는 상상적 산문의 불모不毛, 가치 있는 소설의 절멸絶滅의 10년이었다. 시대정신에 민감한 소설가는 누구나 이모저모로 정치에 연루됐으며, 선전 캠페인과 지루한 논쟁에 크고 작게 휘말렸다. 


- 자율성이야말로 오웰의 작가 또는 지식인됨의 핵심 조건이다. 그것은 개별 과거에 대한 기억 위에서 전통 가치들을 소중한 작가적 자산으로 복원시킨다. 밀란 쿤데라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자신의 체코인 친구이며 역사가인 뷰들Milan Hubl의 말을 인용한다. "한 민족을 청산하는 첫 번째 단계는 그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책 · 문화 · 역사를 말살하라. 그리고 누군가에게 새 책을 쓰고, 새 문화를 만들고, 새 역사를 창안하게 하라. 오래지 않아 그 민족은 현재와 과거를 모두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쿤데라는 이 책에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장"이라고 결론짓는다.


- 문화적 유산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윈스턴의 인식은 그가 그의 심문관 오브라이언의 아파트에서 자신이 형제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있다고 잘못 판단하며 했던 건배사에서 잘 드러났다. "과거를 위하여!" 그가 일기장 첫머리에 썼던 헌사 또한 "미래를 위하여, 아니 생각이 자유롭고 사람들이 서로서로 달랐으며 혼자 살지 않았던 그때, 곧 진리가 살아 있고 일단 행해진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던 그때, 과거를 위하여!"였다. 


- 오웰은, 방치된다면, 전체주의적 경향은 피할 수 없다고 봤던 조건부 비관주의자였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사회주의를 포기하거나 영국사회주의의 장래를 비관하여 공격한 적이 없었다. 오웰은 『1984』에서 묘사된 사회가 반드시 도래라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것이 도래할 수는 있다고 보았다. 가장 큰 위험은 저네주의적 사상이 도처에서 지식인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악몽적 상황이 주는 교훈은 간단했다. 전체주의는 대항해서 싸우지 않는다면, 도처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웰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현재 진행되는 상황, 곧 모든 작가가 아예 침묵하든가 소수의 특권층이 요구하는 쓰레기를 생산해내든가 선택해야 할 때가 영국에도 오리라고 보았다. 만일 파시즘이 승리한다면 오웰 개인의 작가적 삶 또한 마감될 것이다. 그런 상황을 뻔히 내다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찌 보면 윈스턴의 일상 자체가 당의 권력에 대한 지속적인 항거 아니었던가, 비록 그의 저항이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할지라도, 오웰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외부세계에 호소하는 것은 물론 대중운동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웰은 미치광이아 맞설 때 비폭력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프롤prole에게 있다. 그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오웰


- 그가 글을 쓴 것은 예술작품을 만들기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밝히기를 원하는 거짓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적 감정, 부의에 대한 인식이다." 〔오웰은〕 어차피 정치적 글쓰기를 피할 수 없었고 글쓰기는 정치적 작업이었다.


-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 문학은 저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 오웰


- 오웰에게 문학과 정치적 가치는 상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늘 가장 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 이었다고 고백했다. 특히 스페인 전쟁 이후 자신의 모든 진지한 작품이, 직잔접적으로 전체주의에 저항하고, 그가 이해하는 대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써왔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동기가 가장 강력한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어떤 동기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안다. 내 작업을 돌아볼 때, 내가 생기 없는 책을 쓰고, 미사여구, 의미 없는 문장, 화려한 수사, 곧 눈속임에 취해 있을 때는 예외 없이 정치적 목적을 결여했을 때였다는 것을 본다,"


- 오웰은 혹독한 밑바닥 삶을 수차례 경험하고 나서야 자신의 경험들이 문학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을 위한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한 후에 문학에 활용할 생각을 했다. 그에게 삶이 언제나 먼저였고, 어떤 점에서 글쓰기는 그러한 삶의 일부 혹은 연장이었다. 


- 오웰이 작가의 일차적 덕목으로서 줄곧 강조한 것은 예술적 고려가 아니라 도덕적 노력이었다. 그 자신이 모든 글을 "반복해서 고쳤다. 나는 사실상 내가 썼던 글 전부를 적어도 두 번 썼고, 책들은 세 차례나 썼다. 개별 단락들은 5번에서 10번을 고친다." 그는 소설쓰기의 끔찍함으로 인하여 "행복을 잃지 않으려면 절대 소설을 쓰지 말라"고 권고한다. 


- 소설이 갖춰야 할 것 3가지 요건을 중요한 순서대로 열거했다. 첫째 인물의 창출(주제와 관련된다), 둘째 구성, 셋째 문장력이 그것들이다. 그의 일차적 관심은 인물을 통해 구현되는 작품의 주제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주제, 곧 마땅히 표현해야 될 바를 표현하는 일이고, 표현의 방식과 스타일 등 넓은 의미의 작품성은 그 다음에 따라온다. 후자는 교육을 통해서 습득될 수 있지만, 전자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으면 제대로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 오웰은 양쪽 모두에 매우 투철했다. '내려감'의 혹독한 경험이 전자에 관련된 것이라면, 고통스런 반복 작업과 훈련을 통해 마침내 이룩한 그의 언어적 성취는 후자에 철저했던 결과일 것이다. 


- 오웰은 자기 자신에게 혹독했던 만큼 상대편 글에 대해서도 모욕적인 비평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주례사비평이 판치며 비평작업을 사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수생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경계했다. 당시 서평 관행에 대해 이렇게 자기 고백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 만일 서평자가 정직하다면, 10개 서평 가운데 9개는 '이 책은 내게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고료만 없었다면 나는 서평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의 비평에는 "지루하다" "읽을 가치가 없다" "끔찍하다" "아주 형편없이 씌어졌다" "실망스럽다" 같은 표현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는 코널리와 같은 친한 친구뿐 아니라 엘리엇 · 쾨슬러 등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이른바 '대가' 작가들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때로는 인격살해에 가까운 비판을 퍼부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공적인 비평행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 한 차례도 사적으로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본 적이 없으며 오웰과의 개인적 교류를 지속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오웰 비평의 엄정함은 그가 구체적 현장과 구체적 인간과의 대면으 무엇보다 중시했다는 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는 작품이 현실의 구체성을 떠난 경우에는 좀처럼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가령 오웰은 당대의 저명한 세 명의 작가들 - 장 폴 사르트르, 피터 유스티노프, 아서 쾨슬러 - 의 최신 작품들을 평하면서, 그 모두가 "통상의 시공간을 벗어난, 현실 가능성을 떠난 상상의 세계 혹은 먼 과거"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논평할 의욕조차 일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쾨슬러와의 오랜 우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무가치하고 재미없는" 희곡이며, "대화는 지루하고 저자의 생각과 그것의 형상화 사이에 커다란간극으 보여준다"고 혹평을 마다하지 않았다. 


- 오웰은 허구의 작가fictional writer라기보다는 상상적 작가imaginative writer이다. 그는 좀처럼 - 『동물농장』을 제외한다면 - 자신의 경험과 전적으로 벗어난 상황을 만들려 하지 않았거니와, 그의 상상력의 발휘는 '직접 지식'에 의한 서술을 끝까지 밀어붙인 이후에 시도되었다. 많은 비ㅕㅇ가들이 오웰이 진정한 소설가인지를 의심한 이유이며, 그의 소설들이 수차례 출판사들에 의해 거부되었던 부분적인 이유가 그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웰 스스로도 "나는 진정한 소설가가 아니다 (…)  내게는 아직 풀지 못한 고민이 하나 있는데, 열정적으로 글로 옮기고 싶은 수많은 경험들이 있지만, 소설로 위장하지 않으면 그들을 다 써버릴 방법이 없다〔즉 상상이 보태졌지만 기본적으로 경험을 기조로 했다는 의미〕"고 고백한 일이 있다. 


- 무엇보다 오웰에게 좋은 주제란 언제나 보통사람과 관련돼 있었다. 예컨대 자신이 파운드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파시즘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보통사람의 품위'ordinary decency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오웰은 현실의 의미에 대해 형이상학적 토론에 빠져들 필요는 없으며, 글이란 2+2=4인 일상적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면 그 힘을 잃는다고 믿었다. 그는 평범하게 행동하는 보통사람의 세계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았다. 밀러에게 쓴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잔디는 초록으로 빛나고 도들은 단단한 일상의 세계에서로부터 벗어날 때, 나는 늘 불안했다네."


- 그리하여 그는 작가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문학계와의 교류가 아니라 보통사람의 실제 삶과의 접촉이며, 오히려 좋은 글을 위해서는 전자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일갈한다. 


- 오웰의 친구이며 그의 전기를 섰던 조지 우드콕은 오웰을 스위프트 이래 최고의 산문작가라고 말한다. 오웰이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의 사용자요 주창자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유명한 그의 구어체 문장은 조국의 언어인 영어에 대해 가졌던 체질적 민감함에서 비롯된 바 크다. 가령 평가에 박한 오웰이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높이 샀던 맥락이 여기서 멀지 않다. "나는 내가 율리시스를 차라리 읽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 책은 내게 열등감을 안겨준다. 그와 같은 책을 읽고 나서 내 글을 쓰려고 할 때, 나는 마치 발성법 강의를 듣고 난 후의 환관처럼 느낀다."


- 오웰의 연구가인 잉글에 따르면, 권력의 변론자들은 대중을 호도, 마비시키는 어휘들, 기이한 완곡어들을 개발하여 사용해왔다. 예컨대 아군의 사격을 'friendly fire'로, 아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collateral damage'(부수적 피해)로, 광범위한 촌락파괴를 'pacification programme'(평정계획), 선제공격을 'preemptive defensive strike'로 표현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 대량해고가 구조조정 · 명예퇴직(voluntary redundancy) · 노동유연화 등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현상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지배담론의 비민주성에 대하여는 푸코와 마르쿠제 등 많은 학자등이 지적했지만, 특히 마르쿠제는 사고와 토론을 기득권층의 용어와 이해로 제한하는 "일차원적 언어"에 관해 언급하면서, 아주 적절하게도, 이를 "오웰식 - 즉 『1984』에서 창안된 - 언어"라고 불렀다. 실제로 『1984』는 이와 관련된 기발한 예들을 무수히 보여준다. 가령 신언어(Newspeak)는 도덕적 판단의 가능한 표현들을 'good'이란 단위단어의 합성물 - good, ungood, doublegood, doubleplusungood등 - 제한함으로써 가장 조야한 종류의 도덕적 판단 이외의 판단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만일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면, 이중하고(doublethink)로 불리는 사고체계(생각체계)로 하여금 두 개의 모순되는 의견들을 동시에 갖도록 함으로써, 도덕적 진리의, 표출은 말할 것도 없고, 인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오웰이 책의 부록에서 기술한 성범죄(sex crime) 개념은 출산이 아닌 쾌라을 위한 정상적 성적 교섭에서부터 미성년자 강간을 포함하는 모든 형태의 성도착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적 '비행'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모든 '비행'들을 지칭하는데 오직 하나의 단어 - 즉 성범죄 - 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은 동일한 범죄, 동일한 처벌의 대상으로서 인식된다. 역설적으 이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이  아예 무뎌지게 만듦으로써, 가령 강간도 쾌락을 위한 성행위와 다름없는 정도로 비난받을 - 혹은 비난받지 않을 - '비행'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요컨대 『1984』의 신언어는 윤리적 판단의 근거를 전도(顚倒)시켜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타락시키기 이전에 도덕적으로 타락시킨다. 그것은 '나쁜' 작가들을 위한 완벽한 언어이다.


- 위선이야말로 명료한 언어의 커다란 적이다. 정치가 거짓 · 회피 · 어리석음 · 증오 그리고 정신분열의 집적일 때, 정치언어는 거짓을 진실로, 살인을 존경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희망사항에 견호함의 외양을 덧씌우도록 고안된다. 정치가 타락하면 언어가 타락한다는 것이 오웰의 지론이다. 

  당연히 전체주의 체제에서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매체들은 모호한 단어들로 도덕적 누추함을 가리고, 구문을 제멋대로 만들고 섞어서 노골적으로 무의미한 문장들을 양산한다. 거기에서 언어는 "잊혀진 경험의 저장소"가 더 이상 아니며 전체주의적 사고의 통제를 위한 필수적인 통로로 기능한다. 『1984』에서 신언어Newspeak 사전 11판 작업을 하던 윈스턴의 '친구' 말에 따르면, 그것의 목적은 어휘를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최소한의 뜻과 짝을 이루게 만드르로 사고의 범위 자체를 좁히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사고범죄thoughtcrime를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만들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을 표출할 단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런 과정은 문학적 유산과 그런 유산을 만들고 또 그 안에 각인된 옛 사고방식의 폐기를 동반한다. 그때 "말은 후두에서 나올뿐 인간 두뇌와 무관하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담화로 되지 못하고, 하나의 잡음, 곧 '오리의 꽥꽥 소리 같은' 무의미한 구절의 반복일 뿐이다." 전체주의적 사고의 습관과 언어의 타락, 전체주의적 교의의 수용과 나쁜 영어 쓰기는 밀접히 연관돼 있는 것이다. 오웰이 보기에 독일어 · 러시아어 · 이탈리아어가 지난 10~15년 동안 모두 쇠퇴한 이유였다. 


- 오웰이 보기에 제 2차 세계대전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작가에게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전체주의는 예술가를 추동시키는 활력의 원천인 개인의 감정을 억압하고 무엇을 생각할지를 지시한다. 당연히 모든 글은 권력이 요구하는 정치적 ㅣㄹ요를 정당화해야 하고 모든 사고는 변화무쌍한 - 이해관계에 따라 요동하는 - 권력정치를 합리화해야 한다. 전체주의가 작가의 자율성과 정직성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는 한, 문학과 전체주의는 양립불가하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문학은 끝날 것이었다. 


- 아마 오웰은 반드시 비밀경찰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특히 미국에서 나타나는 극단적 소비주의가 훨씬 더 교묘하게 정치를 왜곡하고, 상업적 미디어의 선전과 조작이 보통사람들의 심리와 관계들을 파괴하는 데 더욱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웰의 결론은 이랬다. 문학은 개인의 존엄성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전체주의적 생활방식과 절대적으로 양립불가하다. 문학 그리고 모든 문화적 활동은 민주적 가치들과 어절 수 없이 얽혀 있다. 민주주의의 파괴는 우리가 아는 문명의 실제적 종언이며, 우리 스스로 방어에 나서는 것 외에 대안은 없다. 


- 작가로서 오웰의 삶은 생애 말년에 『동물농장』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까지 말할 수 없이 궁핍했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전업작가도 오로지 인세에 의존해서 생계를 유지하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작가를 부자로 만든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생계에 허덕이는 작가로부터 좋은 책을 기대하기란 더욱 지난한 일이다. 



- "오웰은 상징이 되기엔 너무 혼자였고, 성자가 되기엔 너무 분노했다. 그는 행동 중에 사상을 만들고, 문학을 통해 행동의 틀을 갖춰나갔다. 사상, 행동, 그리고 창작은 오웰의 작가적 삶 전체를 꿰뚫는 삼각편대였다. 그가 영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그가 쓴 글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과 삶, 그가 평생 옹호했던 근원적인 정직성 때문이다. 나는 살아온 인간과 글로 표현된 인간의 모습이 오웰처럼 일치하는 작가를 결코 만난 적이 없다." - 오웰의 친구이자 그의 전기작가 조지 우드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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