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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 답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왜 그렇게 취업하려고 노력하니?"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 다중적 주체인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여성주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미 체계 중 하나이며, '여성주의자' 역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여성주의는 세상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나는 여성으로 간주되지만, 미국에 가면 여성이라기보다는 아시아인 혹은 한국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 여성주의는 성별 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 그리고 다른 사회적 모순과 성차별의 관계에 주목한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그 어느 정치학보다도 다른 사회적 차별에 매우 민감하며, 다양한 피억압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연대와 제휴의 정치이다. 여성이라는 범주, 여성 억압은 젠더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고통, 사회적 불평등은 계급, 민족 등 어느 한 가지 사회적 요인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다. 계급이든, 민족이든, 젠더 모순이든 모두 다른 사회 문제와 관련성 속에서 작동한다. 


- 나는 어렸을 적부터, 대상이 사람이든 이데올로기든 조직이든, 더 헌신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열성이 지나간 뒤의 황폐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왜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열정적인 사람이 상처받는지에 대해 분개했다. 이것이 그 어떤 이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생의 근원적인 불합리이고, 부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고통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권태다. 고통은 변형되어야 하되 잊혀져서는 안 되고, 부정되어야 하되 지워져서는 안 된다. 죽음이라는 사실(fact)는 육체적으로 우리를 파괴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idea)는 우리를 구원하듯이 말이다. 


- '진정한 우리', '진정한 여성'은 없다.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서구/남성의 대랍항으로서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서구/'우리',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서구/남성의 권력이라고 보는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사상이다.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 전체주의 비판자이며 참여 민주주의 옹호자인 유대인 출신의 여성 정치철학자)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 타자(여성) 없이 주체(남성)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씨의 기원성, 유동과 변화, 발전성에 비해 밭 혹은 땅, '어머니 대지'의 본질은 정박성과 불변성이다. 움직이지 않는, 움직일 수 없는 여성은 어제 어디서나 어머니로 환원되고 동질화된다. 여성은 역사와 정치의 질서 밖에 존재하는 자연(고향, 향수, 집......)이라는 의미다. 역사와 문화, 정치는 인간의 힘으로 변화, 역동하는 것이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운명으로 간주된다. 인간(남성)에게 개척되거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의 질료가 될 때에야 비로소 가시화('발견')된다(물론 자연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밭은 씨에 의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 권력 관계의 표지이며 점령지로 간주된다. 남성 정치학의 연대와 계승은 '전쟁시'에는 적군이 소유한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을 통해, '평화시'에는 부계(父係, 夫係)가족을 통해 어머니의 몸을 빌려 작동한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정치학이다. 모성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모든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의미한다. 


- 성(姓)의 변경은 어머니가 재가했을 때,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성과 섹스했을 때 발생한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보았을 때'는 성을 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성을 가는 것이 엄청난 사건인 이유는, 그것이 계급 재생산이라는 가부장제 가족의 근본 질서는 뿌래째 흔들기 때문이다. 


- 가부장제는, 가족은, 국가는, 민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활용, 매개, 동원함으로써만 유지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토록 어머니로 호명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로 간주되는 여성은 성적 주체가 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가질 수 없다. 그녀의 몸은 남성만이 주체가 되는 가족과 국가의 소유다. 


- 대부분의 가정폭력은 가해 남편이, 아내가 어머니/며느리로서 성역할 규범을 어겼다고 판단했을 때 발생한다. 성역할 불이행이 '맞을 짓'이 된다는 사실은, 이 노동이 여성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든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 자기 시대의 지배 규범에 삶을 일치시키기를 거부한 여성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노숙자가 되거나 정신병원에서 죽는다는 신화 '나혜석 컴플렉스'는, 잘못은 사회가 아니라 '똑똑한 여성'에게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협박일 뿐이다. 여성들을 겁먹게 하는 것은 나혜석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남성 사회의 해석이다. 


-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 이제까지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여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 즉,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우에노 치즈코.


-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언어이다. - 에이드리언 리치.


-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삶의 경험은,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열등함의 근원이고 극복되어야 할 장애이다. 그러나 반대로 억압받는 자의 시작에서 가존 사회를 보면, 이들의 타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이것이 바로 모든 탈식민주의 사유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주류의 언어를 규범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익힐수록 이들은 더욱 열등해지지만, 이들이 자신의 경험과 노동에 근거하여 자기 언어를 갖기 시작하면 말할 수 없이 '똑똑해진다'. 저항할수록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남성 소비자가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으로 만족할 때에 발생한다. 


-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누드의 소재가 위안부였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라면, 일반 누드와 포르노그래피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폭력이 이처럼 성애화(sexualized)될 떄, 남성 권력은 보이지 않게 되고 여성 억압은 생물학적 질서로 간주되어 비정치화된다. 


- 남성 권력의 징표 중 하나는 성이다. 남성에게 섹스는 그의 사회적 능력의 검증대이기 때문에 '다다익선'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권력과 자원을 가질수록 많은 여성과 섹스를 한다('가질 수 있다'). 반면,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남성들은 한 여성을 다른 남성과 공유한다. 계급과 섹스의 관계는 성별에 따라 정반대로 나타난다.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한 명의 남성하고만 섹스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많은 남성을 상대해야 한다. 성매매와 성폭력은 이처럼 성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서로 다른 상황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적 현상들이다. 


- 다이어트는 여성 문제 중에서도 여성의 '주체적 종속'이 가장 심각한 영역이다. 


-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이 좌절이나 분노, 우울증 같은 학대당한 경험을 표현하는 것을 억압하는데, 여성이 자기 고통에 직면하지 못할 때 섭식 장애가 나타난다. 폭식이나 거식은 언어화되지 못한 여성 문제가 머무는 도피처, 연막인 거시다. 다이어트는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자아 존중감과 관련된 문제이다. 거식은 여성의 자기혐오로 인한 몸의 '축소 열망'(소멸은 죽음)이며, 폭식은 남성의 투사(投射, 남 탓으로 돌리는)와 대비되는 여성의 내사(內射, 자기 탓으로 돌리는)로 일종의 우울증인데, 사회가 싫어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자기 처벌이다. 


- 나의 타자가 내가 되어서는 해결이 어렵다. 타인의 내 몸에 대한 판단은, 내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경유한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이 먼저다. 


- 가정이 사적인 공간일까? 아마도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에게 가정은 노동의 공간이고, 프라이버시를 침해받는 영역이다. 여성이 타인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사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남성과는 반대로 가정 밖으로 나와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성생활은 프라이버시 영역일까? 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자나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공적인 이슈이며, 정치적 투쟁의 장이다. 


- 젠더 정치의 시각에서 본다면, 좌파와 우파 모두 남성 중심적 정치전선을 강하게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진보 남성과 극우 논객 조갑제의 차이는 없다. 


- 인류가 발명한 제도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것은 전쟁이고 그 다음이 가족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시대와 지역, 종교, 인종, 계급, 교육 수준, 일부일처제와 알부다처제를 막론하고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유일한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폭력일 것이다. 


- 가정폭력은 인정되지 않는 고통, 믿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장에서 인정되는 고통과 달리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자 억압이라는 사실은, 성매매와 성폭력이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주체는 오로지 남성이라는 의미이다. 


- "모든 인간의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라는 말은, 당위적인 진리가 아니라 추구해야 할 희망적 가치이다. 불행하게도 현실에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인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범위는 자연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 차별주의, 인종주의, 서구 중심주의, 가부장제, 비장애인 중심주의, 이성애주의 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권력 관계의 역동 속에서 결정된다. 


- 흔히, 흑인은 인간과 동물의 중간으로, 여성은 인간과 자연의 중간 존재로 '다루어진다'. 


- 역사의 진부는 인간의 범위가 확대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이 부여되는 과정을 말한다. 즉, 인권은 사회적 투쟁 속에서 경합하는 매우 정치적인, '움직이는' 역동적 가치일 수밖에 없다. 


- 현행법상 명예훼손은 피해 여성이 여성단체에 상담하는 등 피해 사실을 제3자에게 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해 남성은 성폭력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피해 여성을 괴롭히는 행위를 남성의 인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성 중심적 사회 구조에 편승한, 가해 남성의 2차 성폭력 행위(social rape, second rape)가 "성폭력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보편적 인권 개념으로 옹호되고 있는 것이다. 


- 성 인지적 시각(gender perspective)


- 결국 인권의 보편주의는 근대적 인권 개념의 성과이자 한계이다. 보편적 인권은 피억압자에게 인권을 적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만, 성차별주의(인종주의, 이성애주의......) 등 구체적인 제도들의 사회적 작용을 고려하여 맥락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인권의 보편성은 억압세력의 지배 전략이 될 수도 있다. "빵을 훔친 사람은 징역에 처한다."라는 법은 평등하지 않다. 부자는 빵을 훔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법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이처럼 개인이 갖는 권리의 내용은 그 개인이 속해있는 성별,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인권은 사회의 권력 관계와 관련 없이 추상적, 초월적으로 본래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구성되고 쟁취되는 경합적 가치이다. 


- 현대 사회의 공(公), 사(私)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는 여성 인권 침해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활동이 사적인 것(the private)과 공적인 것(the public)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집은 일터와 분리되기 시작했다. 봉건 사회에서는 일터, 학교, 집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생활, 프라이버시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 사 영역의 구분은 실제로 분리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근대에 이러르 공, 사 분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일터는 공적인 영역으로, 집은 사적인 영억으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 근대 이후, 여성은 가족을 대표하고 남성은 사회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것이 공, 사 영역 분리의 성별화이다. 모성이나 아동기의 개념도 이때 탄생한 것인데, 여성은 모성의 담지자로 '노동자로서 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성의 가사 노동은 비가시화되고, 산업 예비구, 유휴(遊休)' 노동력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보다는, '누구의 아내'일 때 정상성을 획득하고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다. 때문에 여성에게는 사회적 시민, 노동자로서 정체성보다 아내, 어머니 등 성역할 정체성이 우선시되며, 여성의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은 성역할로 환원된다. '성역할 수행자로서 여성'은, 곧 여성이 사적인 존재로 간주됨을 의미한다. 


- 여성의 삶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 이화여대 학생들과 여성운동가들은 이 사건을 성폭력(gender violence)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여론은 '학생들이 강간을 한 것도 아닌데 성폭력이라고 한 것은 지나치다'며, 이 사건을 고려대 학생들의 '젊음의 낭만, 장난스러운 놀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폭력을 강간으로 한정하는 해석이다. 이 사건은 여성 공간 침탈, 여성의 자율성 침해, 실질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성폭력에 해당한다. 


- 여성에 대한 차별을 성차별이라고 하듯이, 성폭력(gender violence, violence against women)은 강간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 전반을 가리킨다. 1993 유엔이 채택한 '여성폭력철폐선언(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제1조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적,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신체적, 성적, 심리적 해악과 여성에게 고통을 주거나 위협하는 강제와 자유의 일방적 박탈 등 성별 제도에 기초한 모든 폭력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 간 성폭력, 성 전환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 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피해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전환자든, 성기 삽입이든, 이물질 삽입이든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인권 침해이고 성폭력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불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다한 침해죄 - '사유재산권' 침해 - 가 된다. 


-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등 남성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권리는 획득하는 문제는, 곧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 최근 우리사회에서 성매매 방지법 시행을 전후하여 일어난 논란은, 여성 인권과 남성 집단 내부의 타자인 장애 남성, 남성 이주 노동자 인권의 관계를 보여주는 매우 좋은 예이다. 성매매 방지법이 장애 남성이나 이주 남성 노동자의 '성을 살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비등하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인가, 아니면 '남성으로서의 권력'인가?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운동은 장애 남성이 성을 살 권리를 침해하는가? 비장애인 중심의 여성운동과 남성 중심의 장애운동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가? 최근 불가피한 글로벌 경제 현상처럼 논의되고 있는 이주 남성 노동자의 매춘(買春)할 권리가 인권인가? 한국의 성판매 여성이 이주 노동자 손님을 거부하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이 멍드는 일"인가? 등을 질문해볼 수 있다. 


-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인권 개념의 재구성은, 이제까지 지배 규범이었던 비장애 남성 섹슈얼리티를 "우리도 똑같이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적 타자들이 연대하여 대안적인 성 문화를 생산할 때 가능하다. 즉, 남성의 '성을 살 권리'를 비판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비장애 여성의 인권과 장애 남성 인권의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다. 대안적 인권 개념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기존 인권 개념의 확대 적용에 그치지 않고, '무엇이 인간의 권리인가?'에 대한 새로운 물음이 요구된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정치적 상상력과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 정의(justice)로서 평등한 인권은 같아짐(same)이라기보다는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는 것이다. 


- 가사 노동, 자녀 양육 등 주로 여성이 해 왔던 재생산 노동


-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 소수자 문제 - 정체성이 형성되는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따라 인간은 누구나 이방인이며 소수자이다. 그러므로 주류와 비주류, 혹은 사회적 소수자(minorities)와 다수 개념은 정해진 것도 아니고 양적인 것도 아니다. 그 경계를 설정하는 권력함에 따라 범주는 달라진다. 인구의 반에 해당하는 여성을 소수자로 보는 것은 여성 억압의 심도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여성은 사회적 소수자라기보다 정치적 약자이다. 


- 노인이나 장애인, 특히 여성 노인이나 여성 장애인은 탈성화(desexualized)된 존재이다. 이들은 성욕이 없거나 성별 정체감이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 속은 남성으로서 정체성이 우선시되는 성별 사회에서, 탈성화된 사람들은  인간 외 혹은 인간 이하의 사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 가족이 지닌 비정치적 이미지를 이용해 이들의 문제를 탈정치화


- 사랑에 대한 사회적 해석은 같지 않다. 성별, 나이, 섹슈얼리티, 상대방과의 사회적 관계 등에 따라 사랑은 동성애, 이성애, 모성애, 동지애, 형제애, 자매애, 조국애 등으로 분류, 위계화된다. 


-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고통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말해줄 뿐이다.


- 소통의 정치는 여성주의 정치학의 기본 주제이다. 여성들 간의 차별과 억압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녀 간의 그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 남성 사회가 원하는 것은 피해받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의 피해자화이다. 남성 사회가 그토록 선택과 강제를 구분하는 것은, 여성의 피해자화를 통해 남성 주체를 유지하기 위함이고('강제'), 여성이 동의했다는 논리를 통해 남성 주체를 여성에게 확장, 투사하기 위해서이다('투사'). 이는 성폭력 문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들이 성매매와 성폭력을 통해 근본적으로 워하는 것은 '남자 되기'이다. 


- "지금은 피해자가 아닌 우리를 상대로, '강요를 당한다. 피해를 당한다', 피해자로 만들어버리고 있어요." (성판매 여성의 말 인용)


- 사회는 남성의 성 구매 이유를 '성욕 해소'라고 주장하지만, 실상 많은 경우 남성의 성 구매는 보살핌받고 싶건, 본인은 노동과 고뇌로만 가능한 인간 관계를 손쉽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성매매 여성'이라는 말은, 가정폭력, 배우자폭력, 부부폭력이란 용어가 아내폭력의 성별 권력 관계를 은폐하는 중립적 용어이듯이, 성매매의 명백한 남성 권력을 보이지 않게 한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파는 것은 몸이지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성은 팔거나, 팔리는 상품이 된다. 남성 노동자가 파는 것은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팔리는 노예가 아니다.


- 성매매는 기본적으로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성매매와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이 여성의 몸을 사용하는 것을 정상화, 정당화하는 남성 중심 시스템의 핵심이다. 


- 대상('적')이 먼저 존재한 다음에 그것을 보는 것(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내가 곧 적을 생산한다. 타자에 대한 공포가 상상력의 산물인 이유가 여기 있다. (영화 <알 포인트>를 일례로 언급하며)


-  모든 폭력 행위 혹은 폭력이 행사되는 순간에는, 폭력 주체와 폭력 대상이 배타적인 존재로 설정된다. 폭력은 행위자와 대상자 사이에 그 어떤 공감, 소통, 연민, 관계성이 없다고 믿을 때 가능해지므로, 폭력은 극단적인 형태의 이분법적 인식론을 전제한다. 


- 적과 나의 경계가 붕괴되는 공포, 정복되지 않는 타자('베트남인', '여성'......) 등 남성 주체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 


-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는, '신사', '생계 부양자'라는 전통적인 남성의 성역할을 하지 않으면서도(할 수 없으면서도), 남성의 권위를 강조하고 폭력을 자원으로 삼는 이른바 '제3세계 식민지 초남성성(hyper-masculinity)'의 주요 요소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여성 혹은 여성의 성(sexuality)에 대한 타자화와 동일화의 이중 메시지(double binding message)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군 가산제 논쟁에서 "가산점을 인정하라."는 주장이, 남성의 억압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상화하는 타자(여성)에게 차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자도 군대가라."는 주장은 대상화하는 타자가 차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는 동일화 논리이다. 


- 근대 이후 여성은 공사 분리 제도, 이데올로기를 통해 남성과는 다른 형태로 국가, 사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남성들의 세계인 공적 영역은 남성만을 주체로 세우기 때문에 여성이 공적 영역과 관계를 맺거나 경찰, 법 같은 공적 자원을 이용하려면 가족 제도를 통해 남성을 매개할 때 가능하다. 여성과 달리, 남성의 시민권은 가족 제도와 관련이 없다. 남성은 국가와 직접 연결되거나 국가 그 자체이지만, 여성은 남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국가에 닿을 수 있다. 


-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 의무나 권리는 국민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국민의 기준에 미달하는 2등 시민에게는 의무도 권리도 없다.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 브라질의 민중 교육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의 말대로,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읠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 평등의 기준 자체가 남성을 기준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평등은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는 정의(justice)가 아니라, 남성과의 같음(sameness)을 강요하는 남성 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때문에 여성의 '평등한' 군대 참여는, 역사상 어느 국민국가에서도 채택된 적이 없고, 어떤 여성해방 이론에서도 주장된 일이 없다. 


- 보호 관찰소에서 상담 명령을 받은 성폭력 가해자들을 심층 면접한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들은 일반적으로 히퍂 여성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볻는, 성폭력으로 인해(정확히 말하면, 성폭력이 발각됨으로 인해) 남성의 명예를 훼손시켰기 때문에, 남성 일반과 자기 자신에게 죄의식을 느낀다고 보고하고 있다. 


- 기지촌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된 주검 사진은 반미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힘 없는 '매춘 여성'이었기 때문에 전시되는 것이다. 대통력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진은 거리에 전시되지 않는다. 해마다 2천여 건씩 발생하는 주한 미군 범죄 피해자 중 남성 피해자의 사진이 그런 식으로 전시되지는 않는다. 여성주의 세력의 지속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고 윤금이씨 사진이 전시된 것은, 사회적 약자의 피해를 개인의 인권이 아니라 민족적 분노를 촉발시키는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 생전에는 인간/민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다가 미군에게 죽음을 당한 후에야 민족의 성원이 되는 기지촌 여성의 현실은, 남성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여성의 삶이 죽음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살아서는 '진보' 남성들도 침을 뱉는 '가장 더러운' '양갈보'였다가, 죽어서야 '순결한 민족의 누이', '우리의 딸'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남성 중심적 사회운동의 논리가 자기 모순과 위선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이들의 감수성과 일상 문화가 일반 남성 대중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 군대에서 일하는 여성, 군인들이 상상하는 여성 이미지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성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어머니' 아니면 '창녀'의 재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군대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업무 내용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매춘 여성'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군대가 남성의 공간이기 때문에 거친 남성들 사이에 사는 여성들(특히, 낮은 직급일 경우)은 '돌려도 되며', 군대에 들어온 여성은 이미 그것을 각오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공군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공군(womens' air force)이 아니라 '창녀'(womens' all fuck)이라고 부른다. 


- 때문에 남자들 틈에서 살기로 작정한, '고귀함을 잃어버린' 가난한 여성들은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으며, 이들에 대한 성적 비하는 남성 군인들의 성 정체성 확립과 남성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 여성이 전투직에 종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남성 정체성을 위협하는 성역할 파괴를 의미한다. 


- 권인숙, 김현영 등의 지적에 의하면,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 가해자는 통념과 달리, 동성애자가 아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는 피해자 그룹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남성이 두려워하는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특정 형태의 동성애이다. 능동적인 동성애는 남성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다. 남성 사회에서 보통 동성애자라고 하면, 실제로 남성을 사랑하는 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남성', '계집애 같은 남자', '호모', '동성연애자' 등, '여자 같은 남자'를 의미한다. 남성문화에서 능동적인 동성애는 남성의 힘을 보여주는 수단이지만, 수동적인 동성애는 굴욕의 상징이다. 남성에게 성적 공격을 하는 남성과 당하는 남성 사이에는 지배/종속, 남자다움/남자다움을 잃음(여성화), 권력의 획득/권력의 상실 등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 가부장제 성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성에게는 폭력과 성(sexuality)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 미술에서 원근법은 인식 주체인 개인의 등장과 함께 발명되었는데, 근대적 의미에서 이러한 보는(인식) 주체는 백인 남성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보는 사람, 재현하는 주체는 남성이며, 보이는 사람, 재현의 대상은 여성이었다. 보는 주체가 남성일 때 보이는 대상, 타자는 보는 주체를 기준으로 차이가 구성되는데, 젠더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섹스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은 성대화된다. 


- 군대 내 성매매를 '위안'이나 '휴식'등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권력 행위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신체의 요구'라는 생물학적 주제로 이동시켜, 가해 남성의 책임을 비가시화하고 여성의 고통을 주변화한다. 


- 정유진의 지적대로, 군대는 속성상 그 자체로는 독립성, 완결성을 갖기 어려운 불안정하고 위험한 조직이다. 타자의 존재를 생존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타자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군대로 인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훈련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고와 환경 파괴, 범죄 등은 군대가 존재하는 한, 늘 예정되어 있는 사건들이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의 전쟁터(battle ground)다. 남성들 간의 갈등이 여성의 몸에 실현된다는 이야기다. 즉, 기존의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은 남성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논의처럼 여성주의자들은 이 이분법 논쟁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해 왔다. 


- 폭력의 피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사회운동은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론을 강조한다. 피해자가 '잘못'이 있다면, 개인적 항의도 사회적 저항도 어렵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잘못을 했으면 몰라도......", 내지는 "잘못을 했으면 맞을 수도 '있다'" 혹은 "맞아야 한다"는 통념을 수용한 대응이다. 일단, '잘못'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철저히 성별적, 계급적, 인종적, 연령주의적 개념이다. 잘못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의계)에 의해 구성되고 판단된다.


- 원래 만연했던 문제인데, 특정한 정치적 의도에 의해 보도가 자주 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사건이 빈발하는 것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이런 사건들을 파악하는 방법(론)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present)는 언제나 재현(re/present)이다. 재현되지 않는 현실은 없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남성성, 폭력 문제는 하나의 세트였다. 폴 윌리스의 고전적인 지적대로, 혁명이 안 일어나는 이유는 남성의 계급적 타자성이 폭력과 같은 남성성(젠더)으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남성성은 민중 연대와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완충' 역할을 한다. 이것이 진보적 역사주의자들의 바람과 달리, 민중이 반동적인 이유이고 역사가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다. 


- 국가는 관계이자 제도이고 상징이지, 실체가 아니다. 국가를 영토, 인구, 주권을 갖춘 실체로 인식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국가를 의인화된 행위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 의인화된 국가들의 모임이 국제 사회이고, 국제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제든지 힘의 공백이 생기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 이것이 전통적인 국제정치학과 안보 논리의 출발이다. 국가는 의인화된 상징이자 그 상징성으로 인해 실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국가라는 정체(政體)와 개인의 몸의 경합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이었다. "개인이 중요한가, 국가가 중요한가? 국가가 없다면 개인도 없다." 이것이 모든 언설을 침묵시키고 사고를 정지시킬 수 있는 안보 논리이다. 국가 안보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지 않는 국가의 상징 권력을 위한 것이다. 이 논리 구조 안에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 아니, 보호할 수 없다. 


- 삶은 언제나 막다른 그러나 꺾어진 골목과 마주하는 것이다. 


-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re/formation)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개혁(改革)은 글자 그대로 살갖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때문에 어느 시대나 개혁을 외치는 지도층 스스로 피 흘리는 고통을 보여줄 때,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 변태는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