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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천] 고양이의 마술 우리 공장 고양이는 마술을 잘한다. 어떻게 암컷을 만났는지 그리고 역시나 도대체 어떻게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는지 네 마리는 엄마를, 다른 네 마리는 아빠를, 정확하게 닮았다. 밥 집에서 밥도 오지 않았는데 일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 그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우리들 배가 고파온다. 녀석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니야옹! 하는 소리로 온 것이다. 땅바닥에 엎질러준 생선 대가리와 밥을 말끔히도 치웠다. 얼마 후엔 암컷도 같이 왔다. 공장장만 빼고는 일하는 사람 모두 장가를 못 간 노총각들이어서 그런지 고양이 사랑이 엄청 크다. 자본주의가 결혼하라고 할 때까지 부지런히 돈을 모으는 상중이가 밥 당번이다. 밥을 주면 수컷이 양보한다. 공장장은 한때 사업을 하다 안되어 .. 더보기
[문성해] 뒤통수 연가 나는 점점 마주오는 사람과 눈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개하고나 눈 마주치다 그 개가 그러모으는 소리라도 하면 얼른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깐다 나는 점점 마주오는 사람이나 마주오는 개보다는 오히려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가 이리 편안해지니 나는 이제 안전하고 무고하리라 아침의 공원에서 뒤통수들과 안면을 트고 뒤통수들을 품평하고 뒤통수들과 사랑을 한 지 여러달 이제 낯익은 뒤통수라도 만나면 달려가서 뒤통수를 치고 싶어진다 연신 삐딱거리다가 끄떡거리는 것을 보니 그도 나를 알아본 모양 내 뒤통수가 괜히 가렵거나 스멀거린다면 내 것도 누군가를 알아보았단 증거 그때는 조용히 뒤통수의 일은 뒤통수에게 맡긴 채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내 뒤통수는 이제 많은 것들과 허허실실거릴 것이다 이것이 뒤태를 가진 자들의 살아가는 힘.. 더보기
[난설헌 허씨] 연밥을 따며 맑은 가을 호수에 벽옥이 흐르는데 연꽃 깊숙한 곳에 작은 배 매어 두고 님을 만나 물 너머로 연밥을 던지다가 사람의 눈에 띄어 한참 얼굴 붉혔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 난설헌 허씨 (許蘭雪軒) 더보기
[백무산] 빈 집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쑤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년째 집을 .. 더보기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 더보기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 최영미. 더보기
[천상병] 비 오는 날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1백 50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新鮮感)을 나는 어찌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 천상병. 더보기
[신현림] 당신의 참 쓸쓸한 상상 더도 말고 보름간만 호텔 룸서비스를 받으며 호사스런 식사를 하겠다고 아이스크림같이 녹아내리도록 그녀 품에 안겨 애무를 받겠다고 뜨거운 함박눈 속 바위처럼 다만 파묻히고 싶다고 더러워진 와이셔츠, 고뇌의 쇠사슬을 죄다 풀어 태풍 부는 해안처럼 울고 싶다고 어쨌거나 지 임자도 있으면서 엉큼한 당신, 쓸쓸한 당신 육신을 벗으려 몸부림치는 육신 어리석고 서글픈 우리네 육신 - 신현림. 더보기
[마종기]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마종기. 더보기
[마종하] 딸을 위한 시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 마종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