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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인] 오래된 삽 오늘은 피가 나서하루 쉰다 자빠진 삽에게 일 안 하냐고 묻지 마라 - 이기인. 더보기
[황인숙] 독자적인 삶 그래,어떤 이는 자기의 병을 짊어지고자기의 가난을 짊어지고, 악행을 짊어지고자기의 비굴을 짊어지고 꿋꿋이그렇게,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자기만의 것인 것을짊어지고, 쌍지팡이 짚고, 거느리고 - 황인숙. 더보기
[김선우] 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세요 차가운 무쇠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뜻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매촘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 같은 따스한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하얀 양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가래떡이 나오네차갑고 딱딱한 무쇠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긴 칼이나 총알이 아니라 이렇게 말랑고소한 덕이라는 게 별안간 고마워서 두 손에 덥석 받아들고 아, 아, 목청 가다듬네 말랑하고 따뜻한 명랑한 웅변처럼 별안간 프로포즈를 하네 저기요...... 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양 끝에서 먹어들어가기 할까요.. 더보기
[천양희] 생각이 달라졌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난 뒤내 音色이 달라졌다빛이란 이따금씩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빛이란 걸 알고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씩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나는 골똘해졌네 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 천양자. 더보기
[정은미] 돋보기 신문 속의 글자들할아버지 눈앞에서 장난친다. 가물가물작아지고 흐려지고 할아버지는가늘게, 크게 눈 뜨며겁주지만글자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 영호아, 돋보기 좀 가져오렴. 그제야꼼짝 못하고착해진 글자들. - 정은미. 더보기
[허수경] 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 그해 겨울 나는이 도시의 가장 큰 박물관에 있는가장 작은 지하방에 있었다 1.고향에서 강제로 이주된 늙은 신들은 지상 전시실에서 눈동자 없는 눈으로 흉곽을 들여다 보고 있다 세계는 아직 점자가 아니고눈동자없는 눈으로 살펴야 할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가자,가자, 늙은 신들은 발목없는 말을 재촉한다 지상전시실 입장료는4마르크이다 2.러시아에서 온 아낙들이 박물관 앞에서 붉은 별이 선명한군용 모자를 판다 그리스 정교의 성모가 작은 조갑지 같은 박분통안에 들어있다 그들의 사제 중 하나가 성모를 위해 착한 시간을바쳤다 5마르크에 그 시간을 살 수 있다 3.덜커덩, 전차가 지나간다후루룩 국수를 먹는다월남에서 온 키작은 남자가 노랗게 볶은 국수를 판다 고기를넣으면 4마르크, 고기를 넣지 않으면 3마르크이다 4.. 더보기
[최영미] 茶와 同情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네가 준 것은차와동정뿐. 내 마음은 허겁지겁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너덜너덜해진 자존심을 붙들고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 봄이라고 개나리가 피었다 지는 줄도 모르고...... - 최영미. 더보기
[곽재구] 그리움에게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이등기사인 그노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드 불꽃에 대해서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가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얼굴 한 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어깨 나란히 걸음 한 번 옮긴 적 없어도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 더보기
[김기택] 망가진 사람 그는 크고 단단한 체격을 가진 건장한 사내이다. 하지만 이미 망가진 사내이다. 그는 종일 명동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무엇인가 끊임없이 연설하고 있다. 그의 말에는 곡 필요한 부분에 억양과 악센트와 제스처가 들어가 있고 진지한 표정도 있다. 잘 짜여진 문법과 의미 구조의 틀도 갖추고 있다. 그의 말은 너무나 멀쩡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잠시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결국엔 알 수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지나간다.맘가진 마음속에 말이 있다. 말이 그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단지 입술과 혀와 이와 목청이 오랫동안 말을 해왔기 때문에, 그는 말을 한다. 그러나 말은 나오자마자 공기에 싸여 사라진다. 그래도 그는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세 끼 밥을 먹기 때문이며, 밥은 모두 망가.. 더보기
[강연옥] 지렁이 미사여구 없는 몸뚱어리촉촉한 표피 위에 잘 스며드는 슬픔일생이 그저 한 줄 시(詩)다 - 강연옥.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