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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쑥 너씨유 거기가 꼭 충북 보은 장날이었다고는 말 못 해도 그 언저리 부근 좌판을 벌려 쑥떡을 파는 아낙이 있었다는데, 봄날 춘곤증으로 졸고 있었다는데, 허참 좌판을 벌렸으면 되었지 가랭이는 왜 벌리고 조시나 그 앞을 지나는 한 영감이 아낙 조는 가랭이 사이 헐렁한 고쟁이 슬쩍 내비치는 거웃 근처를 힐끔거렸것다 허걱 침을 꼴딱 삼키더니 쪼그려 앉아 거참 쑤-욱 너바쓰먼 조케따 그랬더니 화들짝 아낙이 질질 흘린 침을 쓱 치맛자락 잡아 훔치는데 그통에 아낙 속 고쟁이가 아예 홀딱 짠- 급기야 능청 영감 뒤로 발딱 나자빠지고 아낙은 눈을 꿈쩍꿈쩍 쑥 너씨유 그랬다나 뭐라나 아무렴 쑥떡인데 쑥 안 넣었을라고 쑥국 끓이려 햇살 기웃거리는 쑥을 캐다 왜 그 얘기가 떠올랐는지 쑥 씻어 된장을 풀고 쑥 넣은 쑥국 먹는데, 자꾸 .. 더보기
[김승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 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 더보기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더보기
[신동엽] 소녀의 앙탈 내가 운다고 오는 비가 안 오나 뭐 개구리도 우는데 울 테야, 울 테야. - 신동엽. 더보기
[이문재]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이문재. 더보기
[김기택] 가뭄 울음은 뜨거워지기만 할 뿐 눈물이 되어 나올 줄을 모른다 힘차게 목젖을 밀어올리지만 아직도 가슴속에서만 타고 있다 매운 혀 붉은 입을 감추고 더 뜨거워질 때까지 더 뜨거워질 때까지 - 김기택. 더보기
[김기택] 봄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볕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힘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는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 김기택. 더보기
[백무산] 그 모든 가장자리들 우리 사는 곳에 태풍이 몰아치고 해일이 뒤집고불덩이 화산이 솟고 사막과 빙하가 있어 나는 고맙다나는 종종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끔찍할까지구는 얼마나 형편없는 별일까 생각한다네 내가 사는 곳이 별이란 생각을 잊지 않게지구의 가장자리가 얼어붙고 들끓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네도심에 광야를 펼쳐놓은 비바람 천둥에도 두근거리네 그래도 인간들 곁에서 무엇보다 그리운건 인간이지한두세기만에 허접한 재료로 발명된 인간이 아니라인간이 걸어온 모든 길을 다 걸어온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계통발생의 길을 다 걸어 이제 막 당도한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그 오랜 인간의 몸에 내장된 디스크 메모리를법륜처럼 굴려보았으면 싶은 건데 그래서 나는 버릇처럼 먼 외곽으로 자꾸만 발길이 간다네아직 별똥별이 떨어지고 아무 것도 길들여지.. 더보기
[허수경] 폐병쟁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 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 허수경. 더보기
[백무산] 삶의 거처 강이 어디에 있냐고 그가 물었다 길을 묻는가 해서 내가 되물었다 이리 쭉 가면 다리가 나오느냐고 다시 물었다 비닐 가방에 때 절은 작업복 거친 손에 머리는 반백인 사내 늦가을 찬바람 안고 돌아서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겐 사람의 체온이 종교다 저들의 탐욕과 음모와 속임수로 숱한 찬거리 내몰렸지만 우린 또 기억한다 그 숨막히던 날들 모두가 졸부가 되던 뻔뻔스럽던 날들 모두가 모두를 소비하고 내다 버리던 날들 그 사람 앞에 앉아 나도 밥 한 그릇 받는다 어쩐지 목숨 비치는 국밥 한 그릇 받는다 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목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 백무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