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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영자


스무살 적에 넌 내 첫사랑이었지

눈화장을 하고 매니큐어를 하고

안녕하세요 파인 댕큐 영어를 하고

늘신한 허리 쭉 뻗은 다리로

흔들흔들 내 앞을 스쳐가는 너는

그렇지 몰라보게 변한 네가

코쟁이의 노리개가 되기 전에

너는 영문과에 다니면서도 영어 한번

서울말 한번 쓰지 않던 해맑은

쑥부쟁이 전라도 촌년이었지

손거울 하나 맞춤옷 한 벌 갖지 못하고

그 흔한 파마 한번 하지 못하고

낙숫물이 새는 야학에서

코리언 보이스 비 앰비셔스

칠판 위에 또박또박 적던 너를

나는 안다 네 마음이 미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슬픔이 너를

한꺼번에 미치게 했음을

숨쉴 수 없는 우리들의 헐벗은 그리움이

너를 한꺼번에 돌게 했음을

교환교수 코쟁이 양놈 팔에 매달리며

두 달 후면 한국을 떠나요

깔깔대며 내 앞을 스쳐가는 너는

그리운 내 스무살의 첫사랑이었지.










- 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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